99.9%의 발연기에 나는 스스로 웃음이 터졌고 그런 나를 모를 리 없는 남편도 따라 웃었다.
"당신은 가지나물을 참 좋아하더라. 가지가 몸에 좋다고는 하는데 난 말린 가지 요리는 그냥 그래. 전은 좋지만. "
"그래? 나 어렸을 땐 할아버지 할머니 드시기 좋게 몰캉하게 끓여서 겨울 내내 상에 올라왔었어. 그땐 맛도 색깔도 매력 없었는데 몇 년 전부터 그때 먹었던 맛이 기억나면서 맛있더라고. 전에 당신이 굴소스 넣어서 볶아줬다고 했을 때 그때 참 맛있게 먹었는데 오늘도 그렇게 볶아줄 거지?"
"원래 옛날에 먹던 거 찾고 맛 운운하면 늙는다는 증거랬어. 그리고 뭔 가지나물 하나에 이렇게 절절한 사연을 붙여. 이러면 내가 오늘 저녁에 무조건 가지나물을 해야잖아요 어르신"
"가지나물 하나에 뭐 또 어르신까지. 그런 걸로 치면 당신은 호박고지 좋아하잖아. 그것도 신세대 입맛은 아닐 텐데?"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과 바깥 마당에 있는 하우스 철망 사이사이를 기가 막히게 타고 올라간 호박 덩굴은 여름에 정글처럼 그늘도 만들어주고 매끈매끈한 호박도 보내 주고 까실까실한 호박잎도 선물로 주더니 슬슬 기운을 잃어가는 가을 햇살을 느꼈는지 시들시들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애미야 오늘은 호박을 좀 따야지 않겠나?"
"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애들 데리고 딸까 했어요. 이따 애들 데리고 다녀오세요. 너희는 점심 먹고 할머니 따라 논 위에 밭에 가서 파란 호박들 좀 따"
아침상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지령을 내리셨다.
수업을 마치고 온 나는 럭비공 던 지 듯 책가방을 뜨럭 위에 휙 던지고 신발을 날려가며 벗어 마루로 뛰어올라 전기밥솥에 있는 따뜻한 밥을 퍼서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하얀 무 챗국에 밥을 말아 미친 듯 퍼 먹었다. 할머니는 체한다고 천천히 먹으라 손을 내 저으셨지만 뜨럭에 앉아 두 발을 흔들고 있는 동생들을 보고 있으니 맘이 급했다. 결국 나는 사발채 밥을 들이마신 뒤 상보만 휙 씌우고 마당으로 내려가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리어카 손잡이를 잡고 동생들에게 외쳤다.
"으름 골 여행 가실 분 얼른 타세요"
세상에나! 여름방학에 할머니를 따라 호박을 따러 왔던 덩굴도 어마 무시하게 크고 억셌었는데 그 뒤로 작정하고 영역을 확장한 것인지 호박 덩굴 한 그루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벌어 있었다. 할머닌 경사가 진 돌무더기 사이에 펼쳐져 있는 호박 덩굴을 들추다 혹시나 돌 틈에 발이 빠지거나 깔끄러운 덩굴에 손이나 발목이 쓸릴까 걱정이 되셨는지 동생들에겐 따 놓은 호박만 옮기라 주문하셨고, 할머니와 나만 덩굴 사이를 조심조심 작대기로 덩굴을 들추고 호박잎을 뒤집으며 숨바꼭질을 하느라 정신없는 호박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네에서 소문난 나의 술래잡기 실력 때문인지 호박들은 금방 잡혔고 엄청나게 쌓여갔다.
누군가 일부러 그림을 그린 것처럼 전부 다른 무늬와 모양을 가지고 있는 호박들을 들고 감탄하며 초록빛 연둣빛에 홀딱 빠져 있을 때 신기할 정도로 유난히 반짝거리고 딴딴한 호박을 만난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우리 동네서 가장 반짝이는 이마를 가지신 허 씨 아저씨가 떠올랐다.
"야들아 이거 대머리 허 씨 아저씨 같지 않아?"
손바닥으로 호박을 찰싹찰싹 때리며 동생들에게 보여주자 동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이 마한 것. 동상들한테 좋은 것 가르친다. 어른을 놀리믄 쓰나?"
할머니는 호되게 꾸짖으시고 혹시 주변 밭이나 산에 누가 없는지 살펴보셨다.
"아니 나는 이 호박이 너무 반짝거려서 그래서"
"다시는 그런 말 입 밖으로 내지 말래이"
"네"
나는 웃다가 놀라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들에게 괜찮다는눈짓을 보내며 리어카에 반짝이 호박을 내려놓았다.
"할머이 인제 다 딴 거 같애?"
"니들은 니야까에 호박 다 실었나?"
"네에"
동생들의 기운차고 뿌듯한 목소리에
"다 실었다고? 그라믄 고매 집에 가자"
할머니 말씀에 나는 다시 리어카 손잡이 안으로 쏙 들어가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고, 동생들 대신 호박 덩이들을 태우고 할머니와 동생들이 밀어주는 힘으로 수월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야야 니야까를 수돗가 앞에다 좀 끌어다 논나"
"할머이 호박 갖고 모할라고?"
"모하긴 호박 고자리 맹그르야지"
할머니는 큰 다라에 물을 받고 호박을 풍덩풍덩 빠트리시곤 면수건으로 호박 얼굴을 깨끗하게 세수를 시키시곤 물이 빠지라고 소쿠리들에 건져 놓으셨다.
'똑똑 똑똑 똑똑 똑똑'
새벽부터 쉴 새 없이 들리는 칼질 소리에 잠이 깨어 마당으로 나가니 아직 앞산도 잠이 덜 깼는지 안개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 구석 뿌연 안갯속엔 할머니와 엄마가 갑바천을 깔고 호박을 썰어 소쿠리에 산처럼 담고 계셨다.
"우와 엄청 마이 썰었네? 근데 이거 누가 다 먹을라고?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많긴. 이게 빠짝 말라봐라. 서나케이밖에 안 되지"
"뭐 또 싹 말리서 고모들 싸줄라 마이 하는 거겠지"
"마한 것"
할머니는 나의 말이 우스운지 웃으시며 '마한 것'이라 한마디 하시고 손등으로 코를 훔치셨는데 며느리 앞에서 손녀의 뼈 있는 소리를 들으신 당신이 지금 좀 난처하단 그런 표현이기도 했다.
엄마가 주신 호박 고자리
할머니와 엄마는 열심히 호박을 썰고 계시고 아빠가 챙겨다 주신 채반들과 싸리발을 마당 구석에 비스듬히 세우고 나는 언니를 따라 썰어진 호박을 한 개 한 개 줄을 맞춰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멈추지 않는 칼질 소리와 펼쳐도 펼쳐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작업 시간에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고 빨리 일을 끝내려는 욕심에 소쿠리에서 뭉테기로 꺼내 채반에 던져두니 손으론 칼질을, 눈으론 나를 감시하고 있던 할머니 목소리가 바로 날아왔다.
"느 성처럼 깔꼬롬하게 겹치지 않게 잘 놔야지. 그래 막 쌓아노믄 곰바우 피서 못 먹는다"
"곰바우 피믄 소 주믄 되지"
"저 마한 것 말하는 것좀 보래이. 힘들게 따와 썰고 우째 소줄 궁리를 하나?"
점점 예쁘게 물들어 가는 따땃한 가을의 햇살은 호박을 예쁘게 말려 주었고 그 호박들은 진짜로
쪼그라드니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나의 예언대로 고모들의 친정행과 작은아버지의 방문에 한봉 다리씩 줄어들었고 설날 아침과정월대보름엔 나물 반찬이 되어 식탁에 올라왔다.나는 이 호박 나물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나 큰 아이를 품고 있을 때 꽤 많이 먹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도 고모라는 호칭을 달게 되었고 엄마가 말려 놓으신 호박 고자리를 얻어 오면서 어린 시절 오기만 하면 뭔가 가져갈 궁리만 하는 고모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나를 떠올리며 난처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눈치 주지 않지만 나는 내가 어린 시절 뱉은 말들을 알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모에겐 우리 엄마가 친정엄마 같은 오묘한 관계와 동맹이 맺어졌고 또 그 세월속에 고모란 이름으로 친정을 찾는 내게 엄마는 트렁크가 넘쳐 뒷자석까지 싣게 바리바리 먹거리들을 싸 주셨는데 한참을 달려 집으러 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남편이 조용히 하는 말
"차가 묵직해. 옛말 틀린거 하나도 없어. 딸은 다 도둑ㄴ이야"
맞는 말이라 차마 반박하지 못하였다.
나의 존재는 친정 괴도루팡이 되었지만 먹거리가 갖고 있는 추억과 거기에 들어간 수고와 정. 감사의 마음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기억하며 또 나누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