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네 무꾸 말랭이

무꾸 사탕 먹던 시절

by 별바라기
엄마표 무꾸 말랭이


"야야 누가 있나?"


"어 할머이 내 여 있다."


"자밭에 무꾸 뽑을 낀데 안 갈래?"


"김장할 때도 아닌데 무꾸는 왜?"


"왜긴 해 짧아지기 전에 무꾸 말래이 맹글라 그라지"


할머니와 무꾸를 뽑아온 나는 할머니가 쑥떡쑥떡 잘라준 무청을 헛간 처마 밑에 매둔 줄에 빨래를 널 듯 가지런히 널었다. 그러면 이 무청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가을날을 거쳐 겨울날에 새파랗게 말라갔고 겨울 내내 정월대보름을 지나 봄나물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 집 밥상 위에 올라왔던 효자 식품이었다. (다음에 시래기 얘긴 또 쓸 것이기에 여기선 간단히만)


할머니와 내가 깨끗하게 목욕시킨 새하얗고 새파란 무꾸가 커다란 소쿠리에 담겨 장독대로 옮겨지면 할머니는 미리 깔아 둔 포대자루 위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채를 써셨는데 새끼손가락 만하게 썰어진 무꾸를 나는 바가지에 퍼 담아 호박도 말리고 고추 부각도 말리던 채반 위에다 열심히 펼쳐 널었다. 그러면 가을 햇살과 바람을 만나 일광욕을 마친 무꾸채는 노랗게 색이 변하며 쪼그라들었는데 무꾸채가 마르는 그 시간 내내 마당엔 무꾸 말라가는 특유의 냄새가 까득까득 차 있었다.


마당 구석에 세워둔 채반 앞을 지나가시던 할머니가 두 손으로 잘 마르라고 무꾸채를 섞어 주시고 그 앞을 지나가시던 엄마도 섞어 주시고, 나도 왠지 그 앞을 그냥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아 두 손으로 뒤적뒤적거려주면 손에 닿는 느낌이 촉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배추가 빨간 양념으로 화장하고 김치광 항아리 속으로 꽁꽁 다 숨어 버리던 날에 무꾸채는 윤기가 반짝반짝 나는 엄마표 무꾸 말랭이로 맛있고 화려한 변신을 했다.


"니 이거 무볼래"


"안 매우까?"


나는 할머니가 길쭉하게 썰어준 무꾸 토막을 받아 들고 입으로 집어넣었다.


"우와 할머이 이거 엄청 달고 시원해 무꾸 사탕이야"


입 짧은 내가 한 맛있다는 소리에 곁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던 동생들도 할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뭐 그라믄 내가 니들한테 공갈 칠 줄 알았나?"


할머니가 우숩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할머이 또 없어?"


"기다리 보래이 썰다 또 나오믄 줄팅께"


아까부터 씹히지 않는 무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계속 우물우물하고 계신 할머니는 우리에게 맛있는 무꾸를 썰어 주시려고 뒤적뒤적 고르고 계시고, 우리는 할머니 손만 바라보고 있는데 무슨 규칙인지 모르지만 할머니는 무꾸를 반으로 쩍 하고 쪼갬과 동시에 단맛을 내는 무꾸인지 매운맛을 내는 무꾸인지 기가 막히게 구별하시고선 단맛이 나는 무꾸 사탕을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우리는 할머니 곁에 모여 앉아 간간히 발견되는 무꾸 사탕이라고 이름 붙인 조각들을 기다리며 밖으로 스며 나온 무즙을 혓바닥으로 날름날름 핥아먹다가 단맛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베어 먹었는데 한참 동안이나 진행되는 할머니의 작업 시간에 한 개 두 개 먹다 보니 배도 부르고 그러다가 꺼억하고 올라온 트림. 우리는 서로 그 소리가 웃기고 드럽다며 놀렸고 무꾸 사탕은 길고 긴 트림과 방귀를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김 폴폴 소고기 뭇국

12월이 코 앞으로 다가와서 일까? 날이 추워진다고 낮부터 재난문자가 수없이 들어오고 뉴스도 영하의 기온과 눈 소식을 전하며 추위를 걱정하게 하기에 퇴근길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를 샀다.


추운 것도 추운 것이지만 내일부터 시작되는 작은 아이의 기말고사도 신경이 쓰여 이왕이면 따뜻하고 속이 편한 음식을 멕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끓인 소고기 뭇국.


남편도 아이도 시원하고 달다며 맛있게 먹어주니 나 또한 맘이 좋은데 오늘 시댁에서 얻어온 무를 썰다가 단맛을 내는 무의 정체를 드디어 알았다. 칼을 대니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은 당분을 머금은 잘 익은 수박처럼 쩍 하고 갈라지며 머금고 있던 무즙이 흘러내리는데 그냥 딱 봐도 달겠구나 싶어 한 조각 주워 먹어보니 역시나 어릴 적 할머니가 주셨던 무꾸 사탕 그 단맛이다.


나는 이제야 할머니가 한가득 무가 담긴 소쿠리에서 단무만을 쏙쏙 찾아 썰어 주시던 그 능력을 조금이나마 터득한 것 같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올해도 어김없이 엄마가 썰어 말려 담가주신 무꾸 말랭이를 받아다만 먹고 있으니 무 써는 능력은 그닥 발전하고 있는 거 같진 않지만 국을 끓이려고 아이가 좋아하는 작은 사각형으로 무를 썰다가 기가 막히게 단 부분을 알아보고 본능적으로 한 조각 입에 집어넣고 할머니처럼 우물우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사탕 무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외치고 싶었다.


"무 봤다~~"


어린손주들의 입에 뭐라도 한 개 넣어 주고 싶으셨던 할머니의 정. 입안에 머무는 무의 단맛을 따라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지금껏 이어지는 주렁주렁 삶의 이야기들에 찔끔 눈물이 났다. 행복하면 눈물이 난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눈물 나게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음에, 지금 살아 있음에 감사한 오늘, 지금이다.(밤이라 너무 갬성 뿜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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