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서울구경

서울은 진짜 좋은 곳일까?

by 별바라기

"으 춥다 추워. 귀가 떨어져 나갈 거 같애"


밖에서 일을 보고 들어오던 나는 현관에서 신발이 날아가게 벗어던지고 번개같이 거실 온열 매트 위에 누워 있는 작은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아악 엄마 이러면 반칙이지 나한테 닿지 마"


"뻥 아니고 나 진짜 얼어 죽을 거 같다니깐. 그리고 춥다는 사람이 이 엄동설한에 반팔에 반바지 입고 있음 반칙이지"


나는 짧은 옷을 입고 춥다 하는 작은 아이의 종아리를 두 손으로 덥석 잡았고 아이는 좀 전보다 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모녀가 거실서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은 남편이 방에서 나오고 외투도 벗지 못한 채 떨고 있는 나를 보고 다가와 두 손을 비비더니 양쪽 귀를 살포시 감싸 주었고 금세 몸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무렵


"서울구경"


남편이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내 머리를 들어 올렸고

미처 따라가지 못한 눈꼬리에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아이는 엄마 못생겼다며 웃기 시작했고 갑자기거의 40여 년 만에 당한(?) 따뜻한 서울구경에 나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대박! 당신 서울구경 어떻게 알아?"


"왜 몰라 클 때 아부지나 삼촌이 해주셨지"


"너무 신기해. 지역이 다른데 서울구경은 어떻게 같은 걸까? 귀도 따뜻하고 목도 시원하고 서울구경 괜찮은데"




"니 내 읍을 때 방에 미나리 뿌렁지 박아논 통에 물이 빼짝 마른다 싶음 물도 부주고 느 애미 말 잘 듣고 동상들 잘 보고 있으래이"


"할머이 몇 밤 자고 오는데?"


"글씨 가봐야 알겠지만 삼칠일은 지나야 오지 않겠나"


"삼칠일이 몇 밤인데?"


"도랑에 어름 녹기 전엔 올 끼여"


막내고모가 예정일보다 이르게 둘째를 낳았다는 늦은 밤의 전화는 온 식구의 잠을 깨웠고 할머니는 그때부터 보물 찾기를 하 듯 집안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던 갖가지 물건들을 찾기 시작하셔서 밤 새 몇 덩이의 요술 보따리를 만드셨고 아침 일찍 도착한 고모부의 쥐색빛 승용차에 옥색 한복을 입고 서울로 떠나셨다.


그리고 긴 겨울만큼이나 긴 시간이 지난, 도랑에 얼음은 진즉이나 녹았지만 할머니는 오시지 않았고,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쓸쓸해 보이던 뒷곁 산기슭에 연두색 군자란 싹이 한 뼘쯤 올라왔을 무렵의 어느 날 새까맣던 얼굴의 할머니는 사라지고 도시 할머니처럼 뽀얀 피부를 가진 젊어진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머이 삼칠일만 있다온다믄서 왜 이렇게 마이 자고 왔어"


"언나 난 니 고모가 몸띠이 시원찮아 여러 날 걸맀지. 니는 그간 뭘 먹고 키 빼기가 이래 마이 컸노"


" 키 큰 거 같애? 근데 할머이 얼굴이 왜 이케 하얘졌어? 서울은 물도 좋아?"


"그래 스울은 수돗물도 좋드라. 내 그럼 늬들 스울 귀경시켜 줄까?"


"진짜?"


"할머이 나도 나도"


동생과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할머니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고


"누가 먼저 스울 귀경 할라나?"


동생과 나를 번갈아 보시던 할머니는 동생 등 뒤에서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감싸시곤 천천히 들어 올리셨다.


"스울 귀경"


동생은 재밌다고 웃으며 한 번 더를 외쳤고 동생 대비 키가 크고 몸무게가 나갔던 나는 목 길이만 몇 센티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는데 그 뒤로도 할머니는 우리가 조를 때마다 서울구경을 시켜 주셨다.




언 귀를 녹여 주려했던 남편의 장난에 까마득히 잊고 있던 기억의 소환.


농한기에 고모네에 가셔서 산바라지를 해주고 오셨던 할머니. 깽깽 언 땅이 낮은 겨울볕에 조금이라도 녹았다 싶으면 속눈썹 가득 송알송알 달린 물방울들과 코 끝에 달랑달랑 그네를 타는 콧물을 태워 산에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르셨던 할머니의 손엔 곡괭이 대신 어린 손자가 안겨 쑥쑥 자랐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할머니는 그 산바라지와 고모네 살림살이를 대신하신 덕분에 평생 두고두고 된통 관절통을 앓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뒤로 좀 더 자란 내가 고모를 원망하는 계기가 된 큰 사건이기도 했다.


그 뒤로 할머니는 가끔씩 혼잣말로


"외손주를 이뻐하느니 방아꽁이를 이뻐하지"


라는 말을 하곤 하셨는데 말을 하실 땐 할머니가 괜히 슬퍼 보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얘기들이 숨어 있을 것이고 이젠 영영 알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재밌는 건 나도 엄마가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외손주가 되었다. 우리의 장여사님은 사랑 뿜뿜 넘치게 당신의 일곱 손주들을 사랑해 주시고 아쉬운 건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 내리사랑에 비례하게 엄마의 눈가에 주름살이, 손가락 마디마디 관절마다 관절통과 관절염이 늘어가는 것이다.


시골엔 벌써 농사일이 시작이 되었고 비닐하우스엔 올해 농사를 책임질 갖가지 모종들이 자라고 있다. 봄이 되자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처럼 나도 좀 더 자주 집에 들러 일손을 도와야겠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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