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5:5 정확하게 가르마가 켜진 머리를 굵은 빗으로 빗어 내리신 다음 작은 병에 담겨 있는 파마주 기름을 손바닥에 덜어 비벼 머리에 바르시곤 다시 참빗으로 곱게 빗어 내리셨는데 꼬불꼬불 똘똘 말려 있던 그 긴 머리는 할머니의 손길을 따라 매끄럽게 빗겨졌다.
할머니의 뒤통수에 늘 쪽져 있는 동생 주먹만 한 머리카락은 감으실 때 보면 엉덩이까지 늘어지는 긴 머리지만 묶고 계시면 절대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숱이 적으셨다. 사극에서 보면 흰 속치마를 입고 어마무시한 머리숱을 둥둥 따서 어깨 옆으로 늘어뜨린 배우들을 보면 정녕 저 시대에 저런 머리숱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까? 의심할 정도로 할머니의 머리숱은 차이가 나도 나도 너무 났다. 그리고 그 머리숱의 현실은 애석하게도 역시나 또 대물림이되었다.
아들의 선물과 튤립
2022년의 초 봄.
아들의 입대 후 적적할 무렵 튤립과 히아신스, 백합, 수선화 구근들을 심게 되었다.
베란다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땃해지는 햇살을 느끼며 파종을 한 뒤 매일매일 촉이 났는지 잎이 올라오는지를 관찰하던 날들 속에 어느 날 꽃대가 올리와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날이 따스해져서 꽃 피는 시기가 오니 아들 녀석의 군생활도 덜 추울 거라는 기대를 하던 차에 아들로부터 선물이 도착했다.
[엄마! 엄마한테 무얼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골랐어요. 주무시기 전에 머리 빗어주시면 지압도 되고 혈액순환에도 도움이 된대요.]
'하아... 군대 간 아들이 엄마의 탈모를 걱정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는지, 그리고 빗의 효력과 매력을 더 먼저 알아버린 남편이 날마다 요술봉처럼 들고 있었다.
"아들~ 잘 지냈어? 전화 언제 올까 엄청 기다렸자네"
"통신보안 이병 이OO"
"그건 뭐야? 전화할 때 꼭 그렇게 말해야 해? 혹시 도청당함?"
"아이 엄마 누가 도청을 해요."
"엄마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곁에 있던 남편이 거들고 우리 가족은 스피커로 켜 둔 휴대폰에 머리를 맞대고 아들에게서 온 전화에 속사포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아! 엄마 빗은 잘 쓰고 계세요?"
"응 잘 쓰고 있어. 지압도 되고 엄청 개운해."
"혹시 그 빗 뒤에 제가 각인한 문구도 보셨을까요?"
"문구? 거기에 뭐가 쓰여 있었어?"
Carpe diem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들었던 말인데 제가 저한테 거는 주문이기도 하고 엄마한테도 말해주고 싶어서 각인해서 보냈어요.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현재를 즐겨라 그런 뜻이에요"
"여보 빗 이리 줘봐"
나는 남편이 들고 있던 요술봉을 낚아챘다.
"미안. 엄마가 유심히 살피지 않아서 네가 말해주지 않았음 몰랐을 거야. 고마워"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들은 각인을 위해 일주일을 고민했다고 한다. 허나 까막눈의 엄마는 정작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퉁퉁 퉁퉁 북북북'
저녁마다 머리를 빗는 남편이 내는 소리다.
"어 뭐지 뭐지 왜 자꾸 내 선물에 손대지? 그라믄 나 대여료 받는다."
"아 같은 탈모인끼리 돕고 살자. 근데 이 빗 은근히 시원해 중독성 있어"
"그치? 처음엔 정수리가 좀 아픈 것도 같두만 자꾸 쓰니 개운함이 있지?"
항상 말하지만 유전의 힘은 참 강력하다. 강력하다 못해 징글징글하기도 하다.
우리 집에서 나와 가장 비스무리하게 닮은 남동생도 애석하게도 곱슬머리와 빈약한 머리숱을 피해가진 못했는데 다행히도 부지런한 아내의 내조 덕분에 머리숱은 되살아 났고, 그 효과를 체험한 올케가 내게도 챙겨준 탈모 방지 용품을 뿌리고 있는데 남동생만큼 흡족해질 그날을 기약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그리고 아주까리 사진을 찍으며 잠깐 생각했었다.
'혹시 파마주를 발랐으면 지금 뭐가 달라졌을까?'
할머니는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곱게 빗어 내리셨고 나는 정수리에 아스팔트를 깔 기세로 아들이 보내준 빗으로 북북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머리를 빗는다. 할머니, 아버지, 나. 삼대가 피할 수 없는 탈모를 떠올리며 한 번 웃고 며칠 뒤면 아들의 두 번째 휴가의 문이 열릴 예정이라 두 번 웃고, 어느샌가 요술봉을 들고 설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후훗 세 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