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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Nov 09. 2022

서울간다면서 광주만 빙빙 돈다면?

  남을 아프게 할 만큼 글을 써본 적 있는가

“평생 서울 간다면서 부산 가놓고, 남대문이 왜 안 보이느냐고 떼를 쓰면 뭐라 하겠어요.

글쓰기에서 ‘서울 가는 것’은 자기 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극지의 시 140쪽)”

한 달에 한 번, 책 읽기 모임이 있다. 정해진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인다. 

이번 달은 이성복 시론 <극지의 시 (2014~2015)>를 같이 읽었다. 

<극지의 시>는 시론이지만 시집처럼 크기도 작고 얇다.

시 쓰기와 글쓰기에 대한 성찰과 사색, 쉽게 읽히지만 오랜 시간 되씹어야 할 압축글이다.



30년 기자생활 후 지금도 칼럼을 쓰면서, 나는 얼마나 ‘자기 고통을 응시하며 남을 아프게 할’ 만큼 글을 써본 적이 있었던가. 맨날 ‘서울 간다’면서 광주 언저리만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성복 시인은 무엇을 ‘자기 고통’이라 했나, 시인이 아닌 보통 글쟁이들은 ‘뚫어지게 응시할만한 자기 고통’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이성복은 2001년 발간한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말도 못 했는가>라는 산문집에  ‘액자 속의 사내를 찾아서 –그의 삶, 그의 글쓰기’라는 소제목으로 자신의 글쓰기 삶을 풀어냈다. 이성복은 자신을 '그'라는 3인칭으로 풀어낸다. “타인의 슬픔을 슬퍼하는 그의 슬픔은 타인의 슬픔 이상으로 클 때가 많다. 때로는 타인이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전혀 슬퍼하지 않는데도, 그가 타인의 슬픔을 대신 앓는 경우까지 있다.”


이성복은 자신의 비정상적인 비사교성, 비사회성이 '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을 지닌 그에 대한 어머니의 과보호에 의해 조장된 것일 수 있다'라고 변명한다. 그의 시 쓰기는 ‘자기 고통으로 남 위로하기’이자 ‘거꾸로 살기의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시인 이성복의 ‘자기 고통’은 ‘타인의 슬픔을 대신 앓는 고통’이었다. 


 40대 때까지 나는 시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기껏 중고교 시절 배웠던 소월이나 영랑, 이육사의 시 정도만 알고 있었다. ‘너무 어렵고, 너무 추상적’이라는 것이 시를 멀리한 변명이었다. 그때 기사 쓰기로 하루하루 먹고살던 기자가 생각하는 ‘시라는 것’은 ‘다이아몬드처럼 글을 갈고 다듬는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 그러나 현실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치품’ 정도였다. 


 딴나라 사람들 이야기같던 시어들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우연히 이성복의 시를 읽고 나서부터다. “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 포석을 치고 /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 온몸을 적십니다 (비1 / 이성복) ”. 뜬구름 같던 시어들이 살갗에 닿는 듯 닥아왔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 --- <이별 1 / 이성복> ” 쉼표 마침표 하나없이 이어지는 문장, 구절구절은 '제 구조로써 자신의 하중을 지탱하는 홍예문’처럼 물 샐 틈 하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말과 말,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고유한 맞물림을 찾아내는 거예요. 홍예문처럼 지주를 받쳐주지 않아도 돌과 돌 사이의 맞물림에 의해 스스로 내걸리는 다리처럼, ----(극지의 시 94쪽)” 토론은 진지하고 풍성했다. 시 이야기는 저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201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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