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고쿠 -02
비가 와서 타카마츠에 발이 묶였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사누끼까지는 가야만 했다. 그러나 비 올 때 이동하는 건 자살행위이기에 하룻밤을 더 머물기로 했다. 우동에 완전히 질린 나는 저녁이라도 다른 요리를 맛보고 싶어 근처의 이자카야를 들렀다. 시내 중심부와는 꽤 떨어져 있는 작은 꼬치구이 집이었다. 간판에는 ‘100엔에 맥주 한잔’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조명에 문제가 있는지 간판이 지지직거리며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를 반복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협소한 공간에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숨겨진 술집’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주방이 바로 보이는 바 형태의 테이블에서 중간쯤 되는 곳에 앉았다.
모둠꼬치를 시켜놓고 먼저 나온 맥주를 들이켜는 도중에 한 중년 남성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격식 있어 보이는 정장 차림에, 알 작은 안경. 뒤로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엔 백발이 다소 많아 보였다. 가죽 가방과 구두가 그의 분위기에 꼭 맞았다. 누가 먼저 운을 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어느새 우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대학교로도 수년간 초빙교수의 자격으로 온 적이 있는 대학교수였다. 그가 또박또박 발음하는 ‘안녕하세요’에 적잖이 놀랐다. 나는 한국에서의 시간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그는 마치 씁쓸한 어린 날의 기억을 회상하듯이 안경을 살짝 들어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교수로 임명된 대학교는 지방에 있는 사립대학교였다.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을 앞에 두고 수업을 하는 과정이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다른 교수들과 모임에서 그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모진 시선을 받았다. 수강생들의 태도도 썩 좋지 못했다. 마치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그는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대뜸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싫어하잖아? 그런데 너는 왜 이곳에 온 거야?”
라며 공격적인 어투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독도는 어느 나라 땅입니까?”
라고 한국어로 질문을 했다. 분명히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 번 들었던 물음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리라. 그의 표정엔 분노와 슬픔, 억하심정이 뒤섞여 있었다. 눈은 광채를 잃은 잿빛이었다. 나는 난처했기에 별말 없이 그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으나, 점점 그의 언행이 과격해지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당시 내 심정은, 어긋난 인식을 가진 그를 설득해야 한다는 마음과 우선 위험한 자리는 되도록 피하자는 마음이 공존했다. 길에서 만난 은인들이, 다른 일본인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포근함과 인정. 낯선 이방인에게 베풀었던 따사로운 기억을 뇌와 심장으로부터 꺼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과 수분기 없이 메마른 그의 안구는 나에게 거대한 회색 벽처럼 느껴졌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위로였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말이 칼이 되어 가슴속에 깊숙이 박혔다. 얼른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밤이 감겨 추적이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저 술에 취한 주정뱅이의 지껄임으로 치부해버리기엔 그의 말이 무거웠고 입은 상처가 쓰라렸다.
누구의 잘못일까?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지 못한 나 자신일까? 그 교수일까? 아니면 그가 한국에 왔을 적에 차별과 비난을 서슴지 않은 사람들의 잘못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교수에게 막말한 이들의 양친 혹은 조부모를 총칼로 찍었을지도 모르는 일본 순사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증오의 연쇄가 이어진다. 타인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핏줄과 탯줄을 타고 내려온다.
운명에 핀 곰팡이가 몬태규와 캐퓰릿 가(家)의 두 남녀를 죽인 것처럼, 죄악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자리 잡은 이래로 쭉 지속하여 왔다. 상처가 상처를 낳는다. 흉터 위에 돋친 자상(刺傷)은 미처 아물지 않아 고름이 흘러나오는 살점을 파고들어 엔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의 죄악과 증오의 쇠사슬을 발목에 찬다. 어쩌면 이 매정한 족쇄는 인종이 사라질 때까지 지속할는지 모른다.
TV나 뉴스를 볼 때만 해도 증오와 앙갚음으로 비롯된 범죄를 하루에만 수십 수백 건 접할 수 있다. 남녀갈등, 인종갈등, 세대갈등, 국가갈등 같은 문제들은 전염병처럼 사회에 퍼지며,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잔혹한 갈등의 씨앗으로 남는다.
이것을 끊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학창시절 일제강점기와 강제 노역, 위안부 문제 따위의 역사를 공부할 때면 피가 끓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지고 요 나쁜 놈들. 하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오곤 했다. 그때는 일본을 욕하는 게 정의로운 건 줄 알았고, 조상들이 당한 수모를 갚아 주거나 최소한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 올바르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것들만으로는 절대 이 오래된 갈등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없을 거라는 확신 앞에 서 있다. 복수는 도저히 증오의 연쇄를 멈출 수 없으며, 되려 증폭시킨다. 전쟁이 끝난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양국의 시민들은 무형의, 혹은 유형의 돌을 서로에게 던지며 끊어내지 못한 반목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 의식에 스며든 독소는 총칼보다 무섭다. 차별과 혐오는 사회구성원들에게 퍼져, 방금 만난 일본인 교수처럼 별다른 잘못을 하지도 않은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만 한다.
물론 사실관계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 대한 배상, 국제적 사과 같은 문제들은 하루빨리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다. 시민들이 참여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혐오를 확대재생산 하는 무차별적인 비난은 멈추어야만 한다. 여행이나 유학 등의 이유로 양국을 오가는 이들이 타국에서 오로지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는다면 그것은 2차, 3차적인 피해만을 야기하는 것이다.
"독도는 어느 나라 땅입니까?"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하는 일본인 교수에게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같은 질문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이 일본인을 싫어한다고 단정 지었으나, 본인이 겪은 수모와 핍박을 그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개인적으로 받은 정신적 피해는 누가 보상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의 조상이 저지른 만행이 있으니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과거 십자군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참극의 도화선이 됐던 그릇된 사고방식이다. 그가 입은 상처는 실재하며, 치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여행하면서 증오의 연쇄가 세상 곳곳에 침윤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몬태규는 몬태규 대로, 캐퓰릿은 캐퓰릿 대로 상대방을 찔러야 하는 구실이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찌른 대가는 끔찍하다. 서로의 피가 흐른 자리엔 사랑도, 우정도,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는 빛을 잃고, 짐승을 짐승답게 하는 가치만이 머무른다. 두 손에 쥔 칼과 창을 내려놓아야 악수와 포옹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비난 대신 용서로, 미움 대신 화해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녹슨 쇠사슬을 끊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