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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내꿈은 야구왕

간사이 -01

시코쿠에서 다시 혼슈로 넘어가려면, 건너왔던 세토 내해를 한 번 더 가로질러야 했다. 사누끼를 거쳐 고베시로 이어지는 나루토 대교 앞에 섰다. 시코쿠에 처음 들어왔던 날과 꼭 같은 날씨다. 맑은 태양과 적당한 구름. 바람도 제법 시원했다. 사방이 뚫려있는 대교 앞이라 더욱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와지 섬은 나루토 대교를 끼고 있는 작은 섬인데, 지대가 높고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어 한눈에 주변 경관이 들어왔다. 

▲ 이와지 섬에서 고베를 바라본 전경.


저 멀리 목적지 고베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지 SA(서비스 에어리어)에서 고베로 가는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차량 통행도 잦은 편이었고, 한 번만 성공하면 바로 도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분 후 외견부터 멋있는 벤O가 눈앞에 멈춰 섰다.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이가 조수석에 앉아있었고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분이 운전석에서 손수 내려 짐 넣는 걸 도와주셨다. 


유키코 씨는 활력 넘치는 싱글맘이다. 아들 유다이를 홀로 키우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멋진 분이셨다. 나는 아이를 낳아 본 적도, 나로부터 비롯된 존재를 사랑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고민을 들어주는 것뿐이라면 소질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유키코 씨는 그녀의 인생사를 읊어내며 이런저런 고민거리도 토로했다. 옆자리에 앉은 유다이는 과묵한 편이었지만,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햇볕에 그을려 건강해 보이는 피부와 또래보다 조숙해 보이는 인상. 꽤 남자답고 그의 어머니를 지켜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듬직함이 나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아들이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아낌없이 도우려고 했는데, 유다이는 야구에 소질이 있어 현재 고베시 소속의 명문 야구부에서 유망한 인재로 활동 중이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공부 쪽으로 가야 하나, 야구 쪽으로 가야 하나 따위의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다. 


유키코 씨는 오랜만에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는지(혹은 마음속에 담아뒀던 얘기를 자유롭게 꺼낼 수 있는 대상을 만났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해가 지고 조명을 돋보이게 하는 저녁때가 비로소 고베의 진풍경이 등장하는 타이밍이라고 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었다. 마침 고베와 이와지 섬을 잇는 세계 최장 길이의 현수교 아카시 대교를 지날 적에 낙조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눈부신 가로등 불빛과 더불어 양 갈래로 늘어진 기둥들을 아름다운 조명이 포물선 형태로 꾸미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고베시가 진주를 품은 보석함처럼 빛나고, 좌우의 바다는 수려한 도시를 운치 있게 품고 있었다. 도시를 통과할 때엔 어느 명절을 축원하는 것인지 꽃, 나비, 새 등의 엠블럼에 노란 조명이 알알이 박혀 도로를 비췄다. 

▲ 아름다운 고베시의 야경.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물밀 듯 밀려왔다.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동공에 담는 찰나의 시간. 유리창 밖의 세계가 마치 공연의 주인공을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쏘는 듯했고, 웅대한 시공간 속에 나라는 존재가 심장의 고동 소리를 품고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이러한 전율은 그저 감정의 소요정도로 치부해 버리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쳇바퀴 같은 일상과 척박한 현실로 돌아가 권태를 느낄 때, 타오르는 태양같이 극렬한 기억이 내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하잘것없어 보이는 그 단상이 메마른 정신과 육체에 지지대가 돼 주는 일이 반드시 있다. 여행하는 동안 몇 차례 이와 같은 순간을 경험했는데, 재미있는 건, 보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상 깊거나 자극적인 순간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뜨거운 온천에 노곤한 몸을 담글 때, 게스트하우스 지하층에서 싸구려 감자 칩과 캔맥주를 몇 잔이고 들이킬 때,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 저편 지평선에서 선홍색으로 자취를 감추는 노을에 감동했을 때와 같이, 사람들에게 대단한 것인 마냥 떠들기에도 하찮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흥미롭고 박진감 넘치는 사건들보다 더욱 뇌리에 남아서, 피로에 지쳐 번아웃이 온 순간의 나를 달래주는 것이다. 물론 당시엔 그런 체험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




어쨌든 내가 도시에 자태에 매료돼 있던 사이, 품질 좋은 외제 차는 목적지에 가까워져 있었다. 유키코 씨는 벌써 고베시와 사랑에 빠진 나를 백미러로 흡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유다이 친구네 가족과 저녁 약속이 있는데, 같이 가는 게 어떻니?”


잠은 이미 유다이네 집에서 자는 거로 확정된 듯 보였다. 낯선 이를 집에 들이는 일이 쉽진 않을 텐데, 그들의 배려와 친절이 한없이 고마웠다. 유다이와 같은 학급 친구이자, 야구부 소속인 쇼타와 그의 여동생 마나미, 아버지 와타나베 씨와 어머니 미사 씨와 더불어 우리는 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쇼타네 가족과 유다이네 가족은 부모님들끼리도 서로 친구이기에 자주 만난다고 했다. 


놀랐던 점은, 유키코 씨가 결별한 유다이의 아버지가 와타나베 씨의 절친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남편과 헤어진 후에도 그의 친구와 이리도 친하게 지낼 수 있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동무를 해 보였다. 털털한 유키코 씨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식사 자리는 인사청문회의 장면을 연상시키듯, 두 가족이 나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시간이 된 듯했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됐다. 와타나베 씨는 어린 나이에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는 젊은이가 있다며 본인이 근무하는 도쿄에 오면 유다이의 아버지와 한잔하자고 농중진담을 하셨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나는 유키코 씨의 눈치를 살폈다. 


유키코 씨와 유다이의 아버지 고마이 씨는 일과 일상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 결국 이혼을 택했다고 한다. 유키코 씨는 일에 열정이 있었고, 고마이 씨는 안정적인 가정을 바랐다. 두 분 다 유다이를 사랑했지만, 서로가 그리는 가족의 모습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어찌 됐든, 가족을 아끼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 유키코 씨 가족과 와타나베 씨 가족.

낯선 이방인이 여행자라는 명찰을 달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 앞에 나타났을 때, 때로는 가장 좋은 상담자의 위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잠시 머물렀다 가는 제삼자다. 어떠한 이해 관계없이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늘 만나던 사람들과 끈덕지게 이어져 있는 인간관계, 뒷일을 걱정하며 말 한마디 아끼던 사람도 방랑하는 음유시인 앞에서는 눈물 콧물 쏟아지는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를 돌보셨고 어머니가 돈을 벌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 간에 기대하는 바가 충돌해 갈등을 빚는 경우가 잦았다. 과거와는 달라진 가족 구성원 간의 역할, 위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어느새 사회문제로까지 자리 잡고 말았다. 동양에서 ‘가족 문제’는 다소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띤다. 남에게 꺼내기 남사스럽고, ‘각자가 해결해야만 하는 사사로운 일’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 간의 역할 문제는 사실 생각보다 중대하며, 정도만 다를 뿐 모두가 겪는 일이다. 


인류는 급격한 발전을 이뤄낸 단 몇 세기를 제외하고는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률적인 가족구조를 유지해 왔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사를 도맡는 고전적인 형태는 오랜 시간의 관성을 받아 고착화되어 있다. 동시에 주변의 시선과 분위기를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 유교 문화권에선 남자로서, 여자로서 기대되는 성 역할이 묵계와도 같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사회적인 영향으로 다양해진 가족의 형태와 역할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변화가 우선일 것이다. 


요즈음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선 아이들에게 가족에 대한 개념을 가르칠 때,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가정 같은 케이스를 적극적으로 교육한다고 한다. 지금은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집안일 하는 세상이 아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 역시 달라진 사회를 유연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가족 간의 불화, 남녀갈등과도 같은 문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보일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유키코 씨는 유다이와 쇼타의 저녁 야구 연습을 보러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줄곧 스포츠인들에 대한 경외심을 품어왔기에, 당연히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저녁도 배불리 먹었겠다. 노곤해지는 게 보통이련만, 두 친구는 계단도 두 칸씩 밟으며 성큼성큼 학원 건물로 올라갔다. 실내 골프장을 연상시키는 큰 빌딩 2층에 자리한 연습장은 각종 투구, 배팅 등을 훈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학원 안으로 들어가자 짧은 머리에 스포츠 바지를 입은 학생들 수십 명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긴 팔 티에 모자를 눌러쓴 내 행색은 누가 봐도 이질적이었다. 유키코 씨가 간단히 나를 원장에게 소개했다. 장난기 많아 보이는 원장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그날 하루 훈련에 동참하게 되었다. 여러 학생과 원장으로부터 초롱초롱한 시선을 받으니 매우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연습에 적당히 같은 건 없다. 오자마자 시작된 건 건물 밖 공원 달리기 10바퀴. 사정없는 재촉에 일순 고베 야구부 일원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질 순 없다. 학창시절 마라톤 반에도 참가했던 나다. 아까 먹은 저녁이 위장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뛰었다. 


헉헉대는 나와 달리 쇼타와 유다이는 다이죠부? (괜찮아?)하고 내게 물어볼 만큼 여유로웠다. 달리기가 끝나자마자 이어진 것은 캐치볼&투구훈련. 너덧 명의 학생들 틈에 끼어 볼을 던지는데, 유키코 씨가 그 장면을 영상으로 담아주셨다. 나중에 보니 이렇게 폼이 안 날 수가 없다. 나는 구기 종목이라곤 탁구 빼고 자신이 없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몇 번이고 야구를 권유했을 때 하는 척이라도 해볼걸. 후회가 됐다. 그래도 마음씨 착한 야구부원들은 환한 웃음으로 내 어설픈 투구에 손뼉을 쳐 주었다. 


어느새 연습이 끝났다. 구레나룻과 등 쪽에 땀이 한가득하다. 학생들은 나와 함께 사진을 찍자는 말에 우르르 달려와 주었다. 같이 땀 흘린 자들끼리만 얻을 수 있는 유대감과 행복한 미소. 영원히 남을 추억의 단편 한 자락이 또 남았다. 

▲ 오늘은 내가 야구왕!


쇼타는 오늘 나와 함께 유다이네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다. 우린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매운 라면을 샀다. 아까 내가 한국의 불닭볶음면에 대해 설명을 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일본 라면도 엄청나게 매운 것이 있다며, 일본의 매운맛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표지가 요란한 UFO 사의 볶음면이었다. 우린 집에 도착해 제일 먼저 라면 물부터 올렸다. 한국 라면이 매운지 일본 라면이 매운지 판명 나는 순간이다. 


사실 매운 음식을 그리 잘 먹진 못하는 난 속으로 잔뜩 긴장한 채 젓가락을 입에 댔다. 그러나 예상과도 같이 일본 라면은 그렇게 맵지 않았다. 반면 유다이와 쇼타 쪽은 난리가 난 듯 보였다. 둘은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연신 입속에 넣으며 어떻게 저렇게 매운 걸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먹을 수 있냐고 경악했다. 아까 투구할 때만 해도 늠름하기 그지없었던 두 사내가 귀여운 아이들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닌텐도를 조금 만지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날이 밝고 나서 유키코 씨는 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고, 내게는 아침으로 초밥 도시락과 간식까지 챙겨주시며 고베역에 내려주셨다. 전날 쇼타의 어머니 미사 씨는 노잣돈 3천 엔까지 봉투에 넣어 건네셨다. 그들과의 추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즐거웠던 기억이다. 유타네 가족 덕분에, 오늘 하루 볼품없는 여행자는 자랑스러운 야구부원의 일원이 됐다.


겪어보지 못한 체험을 해보는 일은 마치 영화와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과 같다. 여행을 통해 낯선 이들의 삶으로 함입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체험을 간접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으로 느낄 기회를 얻는 것이다. 오늘 하루, 내 꿈은 야구왕이다. 언젠가 지면에서 활약할 유다이와 쇼타의 앞날을 응원한다.

▲ 쇼타와 유다이. 둘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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