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03
몸살로 앓아누웠던 탓에 오사카에선 별다른 관광을 하지 못했다. 이동하려면 기력부터 되찾는 게 최우선이었으므로 예산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더라도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마지막 날엔 되살아나서 프리허그도 하고 다른 여행자들이랑 보드게임도 즐길 수 있었다.
대도시는 시골보다 의외로 재미가 없다. 각자도생인 데다, 남이 뭐 하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흥미로운 사건이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말을 걸어 봐도 기본적으로 불신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말을 거는 도시인은 높은 확률로 그 목적이 돈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리에 등장하기만 해도 온 주민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시골과는 대조된다. 시골에선 득실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수줍은 성품에도 불구하고 반가움과 호기심만 있다면 선뜻 말을 걸어온다. 요컨대, 시골과 대도시의 차이는 사람 간의 심리적 거리 아닐까 싶다. 물리적 거리도 가깝고 인구 밀도도 높은데 역으로 심리적 거리는 멀어진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흔히들 ‘옛날엔 마을마다 정이 넘쳤지~’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연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도시인을 엄습한 고독감과 소외감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말았다. 인간은 어느새 은하계 속 먼지인 지구처럼 빌딩 숲속 먼지와 같은 개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온종일 험난한 세상에 치이고 집에 돌아와 방 안에 불을 밝히면 나를 반겨주는 이는 하나도 없다. 이웃끼리 살가운 미소로 왕래하며 지내는 일은 신문에나 나오곤 한다. 독거노인들은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묻지마 범죄가 횡행한다.
서울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은 내가 오사카에 있던 날 밤 피해자의 담당의가 쓴 글로 인해 알게 되었던 사건이다. 필자의 묘사가 너무도 생생했던 이유도 있지만, 일의 전개 자체가 절망적으로 잔혹했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피해자는 나와 단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대학생이었다. 그가 나약한 손으로 받아낸 수십 차례의 악의가 피부와 혈관을 깊숙이 찢고 들어가 파르르 떨리는 생명 빛을 앗아갔다는 사실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다가 이런 사회가 되어버린 걸까. 소외감과 고독감. 타인에 대한 불신. 가까이 살면서도 서로를 미워하는 우리가 어쩌면 모두 범인인 것은 아닐까. 젊은이가 살해당했다. 언제든지 당신이 될 수도, 내가 될 수도 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말이다.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향해 날아 들어오는 어떤 칼날도 막아줄 수 없었다. 그저 분을 삼키며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기력함에 통탄했다. 나는 그를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얼른 나아서 다시 길 위에 서야만 한다. 감기약을 두 알 입에 털어 넣고 다시 길 위에 섰다.
다음 목적지는 교토다. 오사카 정도로 규모가 큰 도시에선 교외로 나가는 데에만 해도 한나절이 소요된다. 내리쬐는 땡볕 아래를 큰 가방을 짊어지고 걷고 있는 내 모습이 퍽 가련해 보였나 보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아저씨가 소다 음료수를, 아주머니가 *우메보시를 건네주셨다. 한적한 라멘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데, 주인아저씨가 음식값 600엔에서 100엔을 깎아주며 여행을 응원해주셨다.
*우메보시 : 매실 절임. 습하고 더운 일본에서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흔하게 먹는다.
마유미 씨와 키미코 씨는 오사카의 북서쪽방면 국도에서 만나게 된 미용사분들이었다. 도로가 점차 자동차로로 바뀌기 시작함과 동시에 어느 새부터인지 인도가 사라져 버렸다. 가로로 나 있는 시골길로 빠지기엔 이미 대로의 깊숙이까지 온 탓에, 곤란하던 와중에 두 분을 만났다. 그녀들은 같은 미용실 동료로, 교토에서 함께 일한다고 했다. 말투에 오사카와는 조금 다른, 비교적 부드러운 억양의 교토 사투리가 녹아들어 있었다. 고베 즈음부터 시작해 간사이 지방에서는 표준어와는 확연히 다른 간사이 벤을 느낄 수가 있다.
마치 우리나라 경상도 사투리와 비슷한 느낌의 간사이 벤은, 말꼬리에 비음과 양성모음이 담뿍 들어가서 그런지, 친근하고 귀여운 인상을 준다. (물론 귀여운 사람이 했을 때의 얘기다) 특히나 남쪽 지방의 활력 넘치고 털털한 이미지가 결합해, 특유의 중독성을 자아내는데, 한 번 간사이 벤으로 일본어를 배우면 쉽게 고쳐지지 않을 만큼 마성이 있다. 그런데 교토 벤은 외향적인 느낌보다는, 조금 더 차분하고 점잖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유미 씨와 키미코 씨는 몇 가지 특징들과 예시를 통해 단기속성 강좌(?)로 나에게 교토 벤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교토 사람들의 핵심인 교토 프라이드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는데, 사실 교토 말을 교토 벤(弁, 사투리) 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본인들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일본의 수도는 1,100년 동안이나 이곳, 교토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수도가 에도(江戶, 동경)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교토는 명실상부 해가 뜨는 나라 일본의 정신적, 물리적 도성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게 바뀌었다 한들, 교토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교토가 나라의 중심이라고 여긴다. 아울러 교토가 품고 있는 유구한 문화의 진수는 미국이 원폭 투하지를 논의하던 당시에도 선정에서 제외할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처럼 천년 도읍지라는 사실은 교토 사람들의 프라이드, 자존심을 구축하는 근간이 된다. 교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겉으로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듯 보여도, 사뭇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수도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교토라고 답한다. 표준어를 외려 도쿄 벤이라고 칭하며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들에게 잘못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간 별안간 미움을 사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둘은 교토에 빌딩이나 마천루가 없으며, 실제로 건축법의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도 설명해 주었다. 교토시는 문화재의 경관을 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높이 이상으로는 건물을 세우지 못하도록 법령을 따로 제정했다고 한다. 과연 교토 시가지엔 10층을 넘어가는 빌딩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전통과 문화재를 보존하고, 더 나아가 조망까지 고려하는 일본의 문화 보존 노력이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 화마에 휩싸여 사라지고, 박물관에서 미륵불상이 사라지는 일들이 만연한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대비돼 보인다.
지구에서 반만년 역사를 지닌 나라는 매우 드물다. 최고의 강대국이라 부르는 미국조차도 그 역사가 500년이 안 된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역사가 짧고 이민족으로 구성된 인구구조에도 불구하고 문화 보존과 애국심 고취에 최선을 다한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주요 과목으로 지정하고 소방관을 국가 영웅으로 대접한다. 비인도적 원주민 정복으로 얼룩진 개국 내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인들은 스스로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각기 다른 인종들이 용광로(melting pot) 속에서 하나의 표상과 목표를 위해 노력한 결과 자본주의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기까지 한다.
문화와 역사는 사회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시민 의식을 구성하며, 각자 너무도 다른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한데 모아 공동체로 작동하게끔 하는 동력이 된다. 학문, 종교, 기술은 이러한 공동체의 저력을 토대로 삼아 발전하였으며 인류로 하여금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이룩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때 문화재는 그 어떤 논증이나 토론보다도 명료하고 확실한 역사의 증거이다. 과거를 상상과 추정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아둔한 인간에게 진실을 향한 한 줄기 빛이자, 자명함으로의 가능성이 바로 유물과 사료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문화재 관리는 태업에 가깝다. 최근에야 필요성이 논의되는 듯싶으나, 여전히 다른 선진국들의 노력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하다. 타국에 지배당해 민족의식이 소멸할 위기마저 있었던 나라임에도 말이다.
상냥한 두 미용사분의 도움 덕에 교토 근처 도시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내게 따듯한 끼니와 간식도 챙겨주었고 몸을 지키는 부적의 일종인 오마모리(お守り)까지 건네주었다.
하늘색 비단에 금실로 수 놓인 오마모리를 지니고 걸으면 그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부적은 내 방 한 쪽에 걸려있다. 마유미 씨와 키미코 씨의 상냥한 마음이 지금도 갖은 악운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나와 적당한 공원에 텐트를 치고 또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트럭 운전사 유우키 씨가 교토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옆자리를 내어주신 덕분에, 정오가 지나기 전에 시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교토시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행성에 나그네 자격으로 왔다면, 최소한 비행기 티켓 값을 벌만 한 여력이 여생에 한순간 생긴다면 그 기회비용은 교토를 둘러보는 데에 써야만 한다. 하늘을 향해 뻗었지만, 다른 거사들을 존중키 위해 그 자태가 겸손한 교토 타워가 역 중심부에 있다. 그 윗길을 따라 벌써 북적이는 느낌이 든다면, 기온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이다. 현대 문명이 과거를 향해 고운 손길을 뻗은 곳. 나라와 헤이안을 거쳐 천년의 시간 동안 거리를 비추었을 초롱 불빛이 이제는 전구색 조명으로 번화가를 밝힌다. 화려하다고 말하기 충분하나, 고즈넉한 멋스러움이 여타 도시들과는 차별을 둔다.
교토의 부엌, 니시키 시장은 잡다한 물건을 파는 곳임에도 품격을 갖췄다. 음식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으레 난잡한 분위기를 띠기 마련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듯, 오와 열을 맞춘 향토식이 정갈하게 놓인 채 행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붕으로 구획을 나눈 장거리를 나오면 고요한 강줄기가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이 보인다. 버드나무가 시원한 밤바람에 쓸려 늠실거린다. 양옆으로 게이샤와 마이코의 거리가 죽 뻗어있다. 인간의 행사를 지켜보는 신(神)이 온 세상을 내려보는 것처럼, 대로의 종단엔 폭풍과 바다의 신 스사노오를 섬기는 야사카 신사가 선홍색 토리이를 뽐내며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건 교토의 시작을 알릴 뿐이다. 날이 밝아 아마테라스의 일광이 사바를 비추면, 감추었던 문화의 진수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금각사는 몇 년째 내 핸드폰의 잠금화면을 장식하고 있을 만큼 황홀한 경치를 자랑한다.
두꺼운 황금 칠로 반짝이는 누각과 파아란 하늘,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단풍의 조화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금각사가 교토의 서산마루를 맡고 있다면, 동산엔 은각사가 있다. 일본식 정원 문화를 대표하는 은각사의 정경은 우아한 은화가 부티 나는 금화 대신 경제를 지배했던 것처럼 한 편으로 금각사보다 더욱 깊이가 있다. 은각사 발치의 철학의 길과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길은 사색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그 밖에도 청수사(기요미즈데라)나 지쇼지, 료안지와 같은 문화재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주어진다 한들 완벽하게 둘러보기 무리일 것 같았다. 희대의 걸작들이 한껏 몰려있는 대형 박물관에서는 감탄사를 내리 연발하는 입을 다물기가 어렵다.
그러나 첫눈에 나를 매혹했던, 마치 그 작품과 나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연인이기라도 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한 점의 미술품은 의외로 평범하게, 소박하게 전시돼 있었다. 마치 신카이 마코토 유의 애니메이션 한 장면같이 극적임과 동시에 사실적인 광경은 그저 평범한 기차역 앞에서 펼쳐졌다.
청록색 하늘 아래, 노랑과 검정 스티커가 사선으로 붙여진 건널목 차단기가 먼저 보인다. 나무와 철이 투박하게 땅에 박혀 자갈 이불을 덮었다. 작고 정겨운 주택들이 철도 밖에 도열해 있다. 철길 안으로 들어서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기찻길이 좁아지는 사다리꼴로 주욱 뻗어있다. 작은 글씨로 무어라 쓰인 한자는 필시 역명이리라. 동화처럼 환상적인 공간에서 잠시 멈추었다. 아니, 멈추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금칠한 사찰보다도, 정갈한 정원보다도 내 마음이 사로잡힌 곳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폐기차역에 준하는 마을 외곽 어느 한 지점이었다.
교토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살고 낡은 기차가 출근하는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전통을 소중히 품고 유구한 역사를 고상한 자존심으로 여기는 교토의 가치는 시간이 얼마만큼 지나더라도 지금, 이 철도역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다. 조금은 바뀌고 교체되더라도, 본질과 고풍은 사라지지 않는다. 외려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빛바랠수록 그 모습은 운치 있고 고색창연해지기 마련이다.
전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알 만한 얘기다. 그러나 나는 나고, 어차피 역사 따위는 감지할 수 없는 옛날 일이다.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는가? 전통에 관심을 둔다거나 문화재를 견학하는 것은 그저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처럼 근원을 천착하는 작자들에게 위임하면 될 일이다. 얄팍한 애국심 따위는 국가주의의 산물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소중히 여겨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란 무수한 나날들의 첩첩이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혜택은 이 땅을 앞서 살았던 이들이 목숨을 걸고 연구하고, 궁리하고, 발전시킨 결과 얻어낸 것들이다. 눈앞에 놓인 건물, 입으로 뱉는 언어, 주머니 속 핸드폰 그 무엇 하나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없다. 과거가 삶과 무관해지는 순간 미래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셈이 된다. 존재했던 과거가 와닿지 않는데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미래가 어떻게 와닿을 수 있겠는가?
역사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현재에 갇힌다. 현재가 끝나면 시간은 의미를 상실하며, 나의 죽음은 곧 세상의 종말이다. 여기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왜소한 인간의 가엾은 고립이다. 현재만을 바라보는 인간은 불행하다. 제아무리 찬란했던 순간도 얇디얇은 사진 한 장으로 남을 뿐이며, 장대한 세상을 알면 알아갈수록 개인에게 주어진 지분은 길어봐야 한 세기라는 결론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모든 것을 0으로 되돌리는 전능한 우주의 폭력 앞에 현재를 바라보는 인간은 줄곧 내리막을 내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삶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반하기 이전에, 곳곳에 이정표를 남겨놨던 선현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면, 그리고 뒤를 따라올 새파란 젊은이들을 상상한다면 걸음이 한결 가벼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시작은 누군가의 끝이고, 끝은 누군가의 시작인 것이다. 과거를 등에 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은 진정한 여행자이자, 탐험가가 된다. 그리고 탐험가들의 연대기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영원을 그릴 수 있다. 설령 인간의 노력이 시시포스의 바위를 옮기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실로 우리에겐 시시포스보다는 희망이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이토록 찬란한 발전을 이뤄내지 않았는가!
수족관 속 물고기를 보며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이기심과 유사한 것일까. 교토를 떠날 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 내 것, 내 민족의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도시가 품은 경이로움은 휴가 온 일본인도, 선글라스를 쓴 여행객도, 일본 일주 중인 나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일 터였다. 교토는 문화의 벽화다. 돌벽에 새겨진 그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취를 남긴다. 기억은 기록을 남기고, 소멸하지 않는 어떠한 가치를 서술한다. 가히 ‘문화의 정수’라 불러도 손색없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