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딩크를 지향하는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애환과 고찰
가부장제도가 공고한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이후에 아이를 낳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나는 과감하게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진다. 당연하게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왜 아이를 갖지 않나요?"라고 묻는 것이 결례 인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그것은 당연하지 않다고 용기를 내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용기를 주저앉히는 것들 뿐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남성과 달리 비난의 대상이 된다. 특별히 시부모님으로부터의 압박,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여성만 비난을 당한다. 임신과 출산의 몫이 여성에게 더 많이 분배되어 있지만, 아이를 갖는 것은 '여성만의 일'이 아니다. 부부가 동등하게 함께 책임져야 할 일임에도 남성은 자유로울 수 있다.(우리 남편은 비난하는 소리를 듣지 않지만, 나는 계속 듣고 있고 심지어 우리 엄마도 듣는다.) 그리고 왜 부부의 개인적인 일이 공론화가 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딩크 부부를 선언하면서부터 주변에서 아이를 안 낳는 것에 대한 수많은 소리를 듣고, 친정엄마마저 '그 일'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하는 것을 보며 왜 부부'만'의 일이 모든 사람에게 난도질되고, 비난받아 마땅한 이야깃거리인 것인지. 이러한 구조는 옳지 않다, 당연하지 않다는 것에 눈뜨고 나니 오히려 그것을 딛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불필요한 참견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아이를 왜 낳지 않냐고 묻는 것) 당연하지 않다"라고. 그것은 관심과 염려가 아닌 지나친 간섭이고, 부부의 결정에 개입하는 '선 넘는 일'이라고. 모진 세상 나 하나 살기조차 버거운데 프로참견러들에게 출산에 대한 관심은 엄청난 오지랖이다. 신종 오지라퍼인 '출산 오지라퍼들'이다. 결혼만 하면 출산 오지라퍼들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한다. 출산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관심이고 애정일 수 있는 것이 당하는 이에게는 폭력일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친정엄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이를 낳지 않는 딸 때문에 "제 기도가 부족한가 봐요."라는 송구스러움을 표현해야 하고, "그건 친정엄마의 잘못이네, 시어머니는 며느리한테 말하지 못하니까 친정엄마가 낳으라고 해야지!"라는 참견을 받는다고 한다. 엄마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내가 함께 두들겨 맞는 기분이고, 내가 돌팔매질당할 일(돌팔매질당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에 엄마까지 함께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 속상하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를 선택하지 않은 삶이 고통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내가 이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쓸데없는(?) 이래라 저래라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키워주지 않을 거면서 왜 사람들은, 나의 삶을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체하고, 자신들과 관계없는 일에 끼어드는 것일까. "그러니 참견하지 말아 주세요." 엄마도 사람들 앞에서 당당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마음'이다. 참견하고 싶을 때마다 생각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절실한 무언가 일 수 있다고. 나에게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 절실한 일이듯.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을 때, 기도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더는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가 신기했다. 물론 나는 모르지만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면서 나 몰래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앞에서 엄마는 의연했고, 아이를 낳지 않아도 괜찮다고까진 아니지만, 더 이상 아이를 낳으라는 강요를 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에겐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고, 종교적 신념을 뒤흔드는 일임에도 자신의 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에 고마웠고, 놀라웠다. 그렇지만 그것은 엄마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인 것인지. 시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들어야 하는 소리는 "왜 애를 낳지 않니", "애는 언제 낳을 거니", "너네 정말 애 안 낳을 거니"라는 이야기이다. 시부모님께는 낳지 않는다는 소리가 유일하게 먹히지 않는다. 엄마한테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이젠 그런 공격에도 의연할만하건만, 이런 공격엔 의연하지 않다. 바로 '멈뭄'이를 걸고 넘어 드는 무차별적인 공격이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우리 시아버님이 남기신 명언(?)이다. 나에겐 영감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 말자체가 상처가 되었지만 이제는 글 제목으로 할 만큼 나에겐 지금의 나의 상황을 이 말만큼 잘 설명할 수는 없겠다 싶다. 많은 페친들을 보유하신 인플루언서(?)인 시아버님이 공개적으로 페이스북에 내가 보내드린 멈뭄이 사진(이제는 멈뭄이 사진을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을 올리시면서 "나의 개 손녀다~" 이런 식으로 조롱인지 유머인지 모를 이야기를 쓰시고, 거기에 달린 댓글에 "아들 내외가 낳으라는 손주는 안 낳고 개만 끼고 산다"라고 답을 하신 것을 보았다. 그때는 미처 받아들일 준비 못한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들 내외'라고 쓰여 있지만 결과적으로 개를 끼고 사는 건 오롯이 나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멈뭄이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사실 유기견에 관심을 가지고, 먼저 보호소에서 데려오자고 한 것도 나이고, 데리고 와서 모든 케어와 산책을 담당하는 것도 나의 일이고, 반려견과의 교감도 전적으로 내 것이기 때문이다. 반려견 멈뭄이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나이고, 서로를 가장 많이 의지하고, 의존하며 이 거친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유일한 벗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부모님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시부모님 눈에는 우리 멈뭄이는 눈엣가시이다. 그래서 "며느리가 자기보다 큰 개를 안고 다니더라"라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나에게 굳이 이야기하시는 것도, "신혼부부가 애를 낳아야 하는데 왜 애를 안 낳고 개를 키우냐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시는 것도, 나에게 하고 싶으신 이야기라는 것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개만 끼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나이다. 애를 낳지 않는 며느리가 미우시겠지, 아니꼬우시겠지 싶다가도. 개만 끼고 산다는 말은 상처였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개만 끼고 산다. 그리고 앞으로도 개만 끼고 살 것이다. 그리고 개만 끼고 있어서 잘 살고 있기도 하다.
시부모님께 실제 말로는 못하지만, 지켜봐 달라고 하고 싶다. "앞으로도 개만 끼고 '잘' 살겠습니다." 조롱이 아닌, 내가 잘 살기 위해 선택한 결정에 개가 있는 게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 교양대학 김혜령 교수님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제3시대·양권석 소장)가 6월 28일 개최한 월례 포럼에서 '편들기의 윤리학'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 '잘' 선택하기 위해 '선택하지 않을 권리' 또한 존재한다는 것"「뉴스 앤 조이」, '정권 따라 임신 중지 묵인·반대해 온 한국교회…반동성애·반페미니즘·반낙태로 정치 세력화하려 해')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힘을 얻었다. '편들기의 윤리학'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과 지향하는 가치에 편을 들어주신 것만 같았다. 이전에 교수님 강의를 들을 때도 교수님께선 '실패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정상가족제도 안에서는, 우리가 정상성이라고 구분 짓는 구조 안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 비출산, 강아지와 사는 가족은 실패라고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패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하고, 선택하지 않을 권리 또한 존재한다. 인간의 보편적 나약함을 드시면서 교수님은 이야기하시기도 하셨는데, 보편적 나약함이 원인인 부분도 존재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재생산)이 의무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더불어 출산에 대한 두려움,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성에게만 짊어져야 할 괴로움이라는 것도 출산에 대한 나의 반발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여성이 짊어져야 할 고통이라면 나는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선택하겠다. 그것이 나의 인생을 위해서 '잘'한 선택일 것이라고, 나는 비혼, 비출산도 응원하고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을 응원한다. 어느 것도 온전치 않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말 온전치 않은 것은 온전한 것이라고 믿는 것에서 오는 오만이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모습대로 잘 살기 위해 선택하고, 때론 선택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잘 살든, 못 살든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고, 내가 멈뭄이와 잘 살기로 마음먹은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상이라고 규정지은 삶을 선택하지 않은 모든 삶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