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말에도 꼿꼿하게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기
무례한 말이 독이 되어 마음을 파고들 때 독을 빼내기 위해 쓴다.
시부모님께는 "개랑 만 노는" 내가 아니꼬우실 수밖에. 그렇지만 "아내가 개랑만 놀아서 외롭다"는 말에 당혹스러웠던 것은 '내가 왜 개랑 놀 수밖에 없는지'는 전제되어 있지 않고 고려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남편은 게임하느라 외로울 틈도 없는데 게임에만 빠져 개랑 노는 것이 전부인 나에겐 '외로움'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자식이 혼자 외로울까 염려되는 부모의 마음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그다지) 남편이 게임하느라 나를 방치 또는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도 어차피 그들에게 나의 '외로움 따위'라는 생각에 무력감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얘기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제 그냥 입을 다물게 된다. 나에겐 며느리에겐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이니까.
며느리의 외로움은 떼어 놓고 헤아릴 마음조차 없는 그들에겐 이해 밖의 이야기이니까.
개랑만 놀아서 외로운 건 나이다. 그리고 나는 무척 외로워도 그만큼 외롭지 않다. 개랑 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개랑만 노는 행위가 어떤 식으로 불리든지 나랑 놀아줄(?) 개가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남편은 나랑 놀아주는 개로 인해서 면죄부를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게임만 하는 남편을 내버려 두는 것도, 남편이 없이도 나랑 노는 개가 있기 때문에 개랑만 놀아서 남편이 게임만 한다는 식의 주장은 비약이다. 게임만 하는 남편은 나랑 놀아주는 개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게임에만 집중하며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뭄이 덕분이다. "개를 남편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말에 침묵으로 답한 것은 어쩌면 동의이다. 그것을 느낀다면 외로울 순 있겠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들'만'은 아니라는 것.
하다 하다 돈을 줄 테니 아이를 낳으라는 말까지 들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그분의 사정이 나는 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냅다' 받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나도 '냅다' 받고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여성에게 있어서 재생산이 당연한 의무이고 권리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기계도 아니다. 그런 의미로서 나에게 출산을 강요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이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월 100만 원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도 없어요. 돈을 주신다고 해도 낳지 않겠지만 100만 원으로 퉁치려고 하시는 것도 너무 기가 막힌 일이다. 거기에서 "돈 100만 원으로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요?"라고 사이다 발언을 날렸어야 했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무례하다. 그리고 유해하다. 바퀴벌레가 나타났을 때 해충 방역 업체를 알아보면서 "혹시 소독약이 강아지에게 유해하지는 않은가요?"라고 물었다. 소중한 이에게는 '유해'한 것을 쓰지 않으려는 혹시나 유해할까 봐 걱정하는 게 나에겐 도리인데 시부모님이 내뱉는 말들이 족족 나에게 유해하고 무례하다. 그래서 그 독은 나를 파고들고 스며든다. 비출산을 마음먹었을 때, 딩크를 다짐했을 때부터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내가 부딪쳐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공고한 가부장적 가치관들은 '결혼한 여성=출산'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 나를 억압하고 나를 뚜드려 팬다.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폭력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도 폭력이다. '돈'으로 출산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에게 가하는 폭력에도 나를 지키지 못하고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 권력, 돈, 힘이다. 돈으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사람보다도 돈이 권력이고 힘인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일에 반기를 드는 건 내가 떠나는 모험에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맞서는 방법이다.
해충 방역 업체에서 오셔서 방역을 해주시면서 바퀴벌레가 어떻게 죽는지 이야기를 하셨는데 약을 먹고 바퀴벌레가 바로 죽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바퀴벌레가 그 자리에서 바로 죽으면 '그 한 마리'만 죽는 것이라고. 그래선 안 된다고 '서서히 죽어야 한다'라고. 바퀴벌레가 약을 먹고 돌아가면 자기 동료 바퀴벌레들 사이에서 구토를 하면 그것을 나누어 먹게 되는데 그러면 서서히 죽게 되고, 많은 개체수를 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껏 가부장제도는 그렇게 많은 여성을 죽여왔다. 재생산이라는 억압 아래 여성을 굴복시키고, 많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정당한 것처럼. 나에게 독으로 퍼져서 나를 죽이려 드는 말에 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서서히 죽지 않도록. 다른 사람(여성)들까지 죽이게 되지 않도록. 다른 여성들은 이런 말에 굴복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나부터 먼저 굴복하지 않을 거다. 나는 서서히 죽지 않을 거야. 죄송하지만 단 번에도 안 죽어.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야.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부부를 보며 "개랑 사는 것보다 낫겠다"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개랑 살아도 나은 삶, 괜찮은 삶을 충분하게 살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상처 입고 쓰러져 있던 나를 위로한 것도 그 '개'이기 때문이다. 뭄이는 홀로 울던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자기의 발을 들어 눈물을 닦던 내 팔에 얹더니 팔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핥았다. 뭄이가 주는 위로는 이처럼 작은 행동에서 나온다. 그리고 뭄이만의 의식은 사랑이다. 무례함에 맞서는 건 사랑이다. 뭄이는 그런 사랑을 내게 알려주고, 닿게 해 준다. 뭄이 발이 내 팔에 닿은 것은 뭄이만의 '다독임'이었다. 그리고 뭄이는 내 다리에 상처 난 부위를 마구 핥았다. 내 마음에 상처가 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상처 난 부위를 핥아주는 뭄이의 행위는 내겐 '치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랑 살아도 충분하게 나은 삶으로 위로받고 있다. 개랑 사는 것보다 나은 삶이 어떤지 나는 모르지만, 개랑 살아도 나은 삶은 나를 아프게 하는 이들보다 나를 사랑하는 개 한 마리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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