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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Aug 02. 2022

흉터 덮어주기(타투처방)

[상처끄내기] 1화 흉터에 타투를 처방하다.

앞으로 연재할 또 다른 시리즈는 [상처끄내기]다. 

'상처끄내기'의 뜻은

- 꺼내다

- 끄집어내다

- 끄+ㅌ내다

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의도적으로 '끄내다'라고 표현했다.)

"음습한 상처를 끄내서 따뜻하게 햇볕을 쬐면 잘 익고 아물테지."



떳떳하지 못해도 내 흉터

상처가 나면 '그러다 흉져, 연고를 발라야 돼'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예외의 상처도 존재했다. 흉이 져야만 하는 상처였다. 스스로 낸 것은 흉이 지도록 방치해두곤 했다. 수시로 흉을 낼 수 있게끔.

당시에 흉터는 사랑의 증거이기도 했다. (지금에서 보면 사랑의 증거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땐 절실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프게 하기 전에, 내가 나를 아프게 하면 누구도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어렸을 때 사람들의 말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로 상처를 내는 것보다 덜 아프다고 느껴지는 일이었다. 유난스럽거나 끔찍한 일도 아니었다. 하나의 의식이기도 했다.

나를 달래고, 나를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홀로 어둠속에서 울 때, 식이장애 우울증 온갖 구더기를 뒤집어 쓴채 내 스스로가 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껴졌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냈다. 덜 아프기 위해.

그렇지만 '더 아픈 것'이기도 했다.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나는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이건 사랑이야." 손목을 타고 흐르는 피가 나를 위해 흘러주는 눈물이라고 감격할 정도로 아픔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는 내 팔 한 면을 흉터자국으로 장식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마구마구 흠집을 냈는데 '흉을 내는 시기'를 지나고 나니 흉져버린 자국은 어떻게든 숨겨야 되는 수치가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사랑이었던 것이 치부가 되고, 괜찮지 않았다. 흉터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건 패기였을까. 연고를 왜 발라야 하는지 깨달았다. 스스로 흉터로부터 떳떳하지 못해서 여름이 싫었고, 여름이 아팠고, 팔을 가려주는 긴팔만 입었다. 이로 인해 많은 유해의 말들도 들어야 했다. 반팔을 입기라도 하면 뚜렷하게 보이는 흉터에 "팔이 왜그래요?" "팔에 뭐예요?" 등등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지나친 관심. 그것은 무례. 팔이 왜그런지 알게 뭐람. 떳떳하진 못해도 내 흉터입니다! 사실 흉터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산 증인이기도 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상처도 흉터로 남았을테지.


"너에게 주는 위로는, 상흔

위로란 너그럽지 않아, 잔혹한 거야.

혹독해져야만, 견뎌낼 수 있는 아픔도 있어."

- 내가 쓴 자작詩 '흉터' 中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버티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친 것이었다.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 고통스러울만큼 아픈 경우가 있지 않나? 각자 아픔 속에서 자기가 살 수 있는 숨구멍을 찾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숨구멍은 애석하게도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프지만 처참하진 않았다. "살갗위에서 유영(游泳)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볼 때마다, 아픔을 이겨내고 '살아냈다'라는 생생한  증표이자 지금까지 '살아내고 있다'는 증표였기에 허물이 아니었다. 나의 삶이 지금껏 '살아내야'만 했던 삶이라 '살'만한 증거를 남겨놓아야 한다.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서 아픔으로부터 나는 잘 살고 있다는 증거, 내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증거. 그래야만 아프고 힘들 때 '그럼에도' 다시 살 수 있는 힘, 살아 갈 숨이 된다.


아픔이 선명한 상처를

함께 유영(游泳)하며

자유롭게 숨쉬어,

아프지 말자, 아프지 말자

살아서 내쉬는 숨

- 내가 쓴 자작詩 '유영'中



흉터를 덮어주기

예전부터 "왜그러냐?"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팔의 흉터를 모두가 다 쳐다 보는 것 같고, 반팔을 입기 시작할 용기를 내면서부터 팔에 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팔로 향하는 모든 시선이 아팠다.

매번 팔을 베베꼬며 팔을 가리기에 급급했고, 팔의 흉터에 대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살아냈다는 증거는 무색하게도 감당해야 하는 현실앞에서 구차해졌다. 그것이 싫었다. 내가 살아낸 상처가 구차하게 사람들 앞에서 도망쳐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그래서 이전부터 '타투'를 하고 싶었다. 흉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흉터가 더는 흉터가 아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투도 상처를 내는 것이었다. 흉터위에 상처를 내는 결단을 했다. 다신 상처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마지막 상처를 허용했다. 타투를 결심하고 받으러 갔을 때, 타투이스트는 단박에 자상이라는 것을 알았고, "상처가 난 곳에 다시 타투를 하면 엄청 아플 거예요.", "울지도 몰라요"라고 겁을 엄청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겁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4시간을 살갗을 찌르는 고통을 몸소 감당해야 했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기절했으면 좋겠다', '내가 타투를 왜 한다고 했을까' 눈 뜨고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서 눈을 감고 고통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삶들을. 내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혀가면서까지 살아야했던 나의 안간힘을. 타투를 받는 것이 치유처럼 느껴졌다. 아팠던 흉터에 다시 누구도 상처입힐 수 없게 단단한 '결박'을 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스스로 누구도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하게 상처를 입혔다면, 이제는 다시는 상처입히지 못하도록 단단한 결계를 팔에 쳐놓았다. 그리고 상처에 꽃을 피웠다. 나비도 그려달라고 했다. 의미를 덧붙였다. "잘 익은 상처에는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온다."라고. 타투를 받을 때 타투이스트가 "다시는 하지 못할 거예요. 너무 아플테니까요."라고 했는데. 정말 죽을만큼 아파서, 다신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았고. 예쁜 꽃위엔 나비만 남겨두기로 했다. "상처가 많은 곳이 더 아플 거예요"라는 타투이스트 말처럼 상처가 많은 부위가 가장 많이 아팠는데. 아플 수록 꽃은 진해지고, 다시는 아프지 말자는 나와의 약속도 굳건해졌다.


스스로 떳떳해지기

타투를 했다고 바로 괜찮아지는 마법같은 건 없었다. 타투를 하니 이제 '타투'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야 했다. '타투'를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 타투이스트가 타투를 해주면서도 이야기한 것이다. 타투를 한 사람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는 늘 낯선 시선에 놓여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몸으로 또다른 차별과 혐오에 맞서야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볼까 무서워서 숨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른 의미로 들키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타투'를 한다고 흉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스스로 떳떳해지고, 자유롭지 않는 한 타투가 억압이 되고 족쇄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나니. 타투한 내 팔을 조금 떳떳하게 보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러면서 타투를 했냐고 물어보기 시작했고, '전혀 몰랐다'라는 이야기도 듣고. 그때 또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팔에 있는 흉터를 본 사람이 많지 않았을 수도. 타투를 한지 2주째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을 보면, 나의 흉터 또한 별 일 아니었을 수도 있다. 타투를 하고 숨길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데 나 혼자 전전긍긍하느라 힘들었던 시간이 우스웠다. 그리고 더 놀라운 발전은 타투를 한 팔을 사람들이 세심하게 볼 때, 수많았던 흉터 자국들이 엄청나게 큰 꽃에 가려져 (사람들이 자국을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흉터가 꽃에 가리워졌고, 가리워진 흉터는 이제 꽃으로 피어났다. 그래서인지 예쁘단 소리도 들었다. 한 번도 내 흉터자국이 예뻤던적 없었는데 이제 예쁜 꽃이다.


객기 좀 부려봅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례한 사람들은 있는 법. 타투를 한 팔을 보고 호들갑을 떨면서 "이거 불법이잖아요!"(맞는 말이지만)부터 시작해서 아프지 않았냐, 아픈 걸 왜 했냐, 작게라도 하지 이거 지워지지도 않는데 어떡할 거냐,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안할 것 같이 생겼는데 놀랍다면서 왜 했냐고 추궁하며 모든 사람앞에서 면박을 주었다.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했어요. 그 이미지 깨고 싶어서요. 금기도 넘어보고 싶고, 객기를 좀 부려봤어요." 순수한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예전 나의 닉네임은 '순수곰'이었다. 순수곰이고 싶지 않아서 벗어낸 나의 이미지, 완전무결하게 순수할 순 없다. 조금 발라당한 당돌함을 가지고 싶었다. 말괄량이처럼. 내 인생에 객기부려보는 것도 나에겐 모험같은 일이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 객기를 부릴 수 있는 용기는 흉터를 벗어나고자 냈던 용기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아니다. 시어머님은 보자마자 충격을 받으셨다. 똑같은 래파토리.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지 않냐며. '그런 이미지'가 아니고 싶어서 객기를 부리기 잘한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이미지에 갇혀서 웅크리고 살지 않을 것이다. 꼿꼿하고 떳떳하게 내 갈길 가려 한다. 그래서 아픈 상처를 끄내고, 햇볕에 무성하게 피어난 꽃과 잘 익은 꽃에 날아들은 나비와 함께 살란다. 비록 무지막지하게 아팠지만 아픔을 이겨낸 아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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