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가사노동의 애환 그럼에도 살아갈 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라서 영화에서 나온 '붕괴', '마침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돈다. 특히 '붕괴'라는 단어가 마음에 박힌 상태이다. '붕괴'는 영화에서도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는 결혼을 하고, 영화에서 박해일(해준)이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고요!!"라고 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결혼 이후의 나의 삶은 무너지고 깨어짐의 연속이다. 여성들에게 결혼은 가부장제도라는 단단한 벽 앞에서 몇 번이고 무너지고 깨어지는 순간들을 버텨내야 하는 것 같다.
분명 사랑을 속삭였던 때가 있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이 사람만큼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던 때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파편이 되어 지금은 나를 찌르고 있지만 말이다. 이 사람만큼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도 없다며. 나의 친구도 말리던 결혼을 하면서 "이 사람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현실은 "나는 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다를 바 없다. 우리 둘의 이야기 주제는 '누가 더 붕괴되었나'이기도 하다. 사랑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다만, 사람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다만 '이런 나를 이해해달라고 내 아픔에 공감해줄 수 없냐'던 말에 "너는 이해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라는 답을 들었을 때 '마침내' 나는 무너져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고, 내가 아픈 걸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모두 욕심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귀에 발린 소리를 듣고 싶으면 돈 주고 상담이나 받아"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돈을 내고 상담받는 게 이러한 욕구를 가장 잘 해소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내 아픔에 공감하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아픔이 반복될수록 지겹고, "너를 포기하고 싶다"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너 감당 못해"라며 거부된 나의 아픔은 이제 오갈 데 없어졌다. 차라리 "멈뭄이 데리고 시골에 가서 살라"는 그의 말이 '우리'를 위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랑은, 아니 나의 사랑은 붕괴되었다. '(죽을만큼 힘들다던 나에게) 내가 죽으면 멈뭄이를 나랑 같이 생매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나의 사랑은 매장되었는지도.
남편은 가사노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하는 건 분리수거이다. 그마저도 제때 하지 않아서 싸우기 일쑤이고, 애원을 해야만 '해주는 것'이다. 왜 여성에게는 가사노동은 '당연한 것'이고, 남성에게는 '해줘야 하는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불평등은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고, 많은 책을 통해 읽었지만 실제로 겪어내야 하는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남편은 자신이 마신 컵 하나 씻지 않고, 자신이 먹은 쓰레기를 싱크대에 그대로 올려놓고서는 "말려서 버리려고 하는 건데. 그전에 네가 버린다"라고 항변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아무렇게나 놓아도, '버려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요리 제외한) 모든 가사노동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그건 당연한 것이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적한다.(이것도 나는 권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성은 여성에게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한 번은 음식물 쓰레기를(원래 남편 담당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나의 음식물들(;)이라고 하면서 내가 버려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틀인가 버리지 못했는데 남편이 "대체 음식물 쓰레기는 언제 버릴 거냐고." 지적했다. 나는 억누르던 감정들이 폭발하여서 울음보가 터져버렸다. 내가 힘들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못한 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었을까. '네가 먹은 음식물'이라는 말에 참다 못해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속옷 다 내가 빨래하고 개서 네가 입을 수 있는 것이고, 네가 들고 있는 물컵 내가 설거지해서 네가 쓸 수 있는 것이고, 네가 편하게 앉아서 게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혼자 쓸고 닦고 다하기 때문이라고. 네가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내 희생 위에 있는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이게 납득시켜야 하는 상황인 것이 더 가슴 아프다.
남편이 편하게 게임할 수 있는 현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진실은 혼자서 가사노동을 '해내고' 있는 나의 '노동력'이다. 남편은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과하게 육체적·정신적으로 소모되고 있다. 강아지 케어와 산책을 나 혼자 하는 것은 괜찮다.('네가 데려온 개'라니까 더 잘하고 있다.) 하지만 가사노동은 왜 나(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간절한 애원으로 한 분리수거에 대해서 "고맙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무참하다. 그러지 않으면 '다신 하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남편의 가사노동은 '고마운 일'이고, '애쓴 일'이지만 나의 집안 노동은 너무나 사소하고 당연해서 누구에게도 고맙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일이다. 내가 배운 건 이게 아닌데. 성평등을 외치는 게 무색한 현실 앞에 "네 삶이나 잘 살라"라며 남편이 비웃는다.
그래서 내가 싸울 곳은 이곳이다. 가정이라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도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 나의 활동인 것이다.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는 가부장 벽. 집안 노동이 분배되는 날보다 분리수거마저 내가 직접 하는 날이 더 빠르게 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리수거까진 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버틴다. 내가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게 '내가 할 일'이 되어버리면 나는 정말 나에게 미안해야 한다.
남편과 나는 같이 일을 하지만 집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내가 가사노동에 마구 치일 때 남편은 게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가 매번 처리되지 않아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바퀴벌레가 나타났다. 쓰레기통이 있는 베란다에 등장한 녀석. 나는 너무 놀라 소리치며 남편을 불렀다. 여기로 와달라고 아무리 질러대도 남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게임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결국 내가 혼자 바퀴벌레를 처리하겠다고 겁 없이 바퀴벌레에게 다가갔는데 뛰어오르는 바람에 기겁하며 소리질렀다. 바퀴벌레와 함께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남편은 열심히 게임 중이었다. 바퀴벌레가 도망갈 것 같다고 남편에게 화까지 냈지만(와도 벌레를 잡지 못하는 남편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혼자는 무서웠다. 같이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바퀴벌레에서 시선을 옮긴 그 짧은 순간 바퀴벌레는 자취를 감췄다. 내 마음도 함께.
바퀴벌레를 놓친 것도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더 좌절스러웠던 것은 '와달라고' 애원해도 게임하느라 듣지도, 반응하지도, 와주지도 않은 남편의 모습이었다. 나의 애원은 무참히 씹혔고, 게임을 하는 그에겐 요란스러운 BGM이었는지도 모른다. 바퀴벌레보다 더 무서운 건 남편의 무관심함이었다. 바퀴벌레와 난동을 피우고 있는 나에게 전혀 관심 갖지 않는 것. 아무리 소리쳐도 공허하게 맴돌던 나의 외침. 어쩌면 바퀴벌레와 외로운 서로를 위로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바퀴벌레를 처치하려는 것보다 더 급선무는 게임중독에 빠져 나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남편을 처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게임 아이템과 게임 한정판 굿즈를 받겠다며 3일 내내 밤을 지새우며 게임에서 만든 빵을 사러 다녔던 적이 있다. 그때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절망한 것이 남편이 관심이 있는 것에는 저렇게 노력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3일내내 밤까지 새가며 빵을 사는 정성과 열정. 나는 그 빵에도 밀렸다는 것이 참 참담했는데, 이제 바퀴벌레에게 위로까지 받아야 할 판이다. "야, 아무리 불러봐도 이곳에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남편은 바퀴벌레 가지고 뭘 그렇게 하냐고, 중요한 것 같지 않아서 안 왔다고 하는데 이건 바퀴벌레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바퀴벌레도 듣는 소리를 남편은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한 언니와 허심탄회하게 무엇이 잘못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까지 나왔다. 우린 거기까진 가지 말자고 하며 "결혼을 한 것이 잘못"이라고 결론 냈다. 언니도 육아와 집안일에 홀로 시달리며 힘든 상황이었다. 우린 여성으로서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상황에 처해 있고, 둘 다 견뎌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전에 언니와 이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다시 태어나진 않겠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면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언니는 '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거라고, 돌로 태어날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나무로 태어날 테니 우리 서로 옆에 붙어서 자유롭게 살자'고 했다. 돌과 나무로 함께하자던 마음. 시부모님과 떠나는 여름휴가에서 '잘 살아 돌아오겠다'라고 살아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마음. 이 마음들은 왜이렇게 애틋하고 아플까.
그럼에도 언니는 이야기했다. "결혼은 후회하지만 아이를 못 만난다는 것은 너무 슬프다고.(그럼에도 결론은 결혼은 안 하겠다고 했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멈뭄이를 만나지 못했을 거라고. 동생도 내가 결혼생활로 힘들 때면 "멈뭄이를 만난 것으로 위안을 삼자"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도, 멈뭄이도 못 만났을 거라는 위안으로 사는 삶이 있다. 그것이 우릴 살아가게 한다.
바퀴벌레 사건을 겪은 뒤 삶에 대한 회의감마저 생긴 순간 자기와 놀자고 해맑게 나의 곁에 붙어 있는 멈뭄이가 나를 위로했다. 멈뭄이는 늘 나에게 살자고 한다. 자기와 놀자고 하는 것은 함께 살자는 말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어요!?"라고 물었을 때, 난 생각했다. 해준이가 핸드폰을 버리라고, 살인의 증거들을 버리라고 했던 행동이 서래에겐 사랑이 아니었을까.(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 내게는 멈뭄이랑 장난감을 가지고 삑삑 대며 놀고, 공돌이 하는 행동이 사랑이고, 장난감을 던지며 놀자고 하는 멈뭄이의 행동이 살자는 말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살아갈 결심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