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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Jul 27. 2022

구(조)한 삶

유기견 멈뭄이가 구해준 삶

너는 어디를 떠돌다 왔니

2021년 1월 29일 금요일 아주 추운 겨울. 반려견을 입양하고자 양주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에 갔다.
너무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고, 차도 없이 먼 길을 가야 했지만 그럼에도 설렜던 건 기다리던 멈뭄이를 드디어 만날 수 있어서였다. 멈뭄이는 태어난 지 3개월 정도 되었다고 유츄되는 유기견이었고, 형제들과 함께 보호소에 온 듯했다. 사실 우리가 처음 데려오려고 한 아이는 엄청 귀여웠던 탓인지 이미 입양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독 입양이 안 되던 다른 형제는 공고 마감일이 다가오고 안락사 위기에 처했다. 철장에 웅크린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서 데려오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듣게 된 사연은 아이가 전염성이 있는 코로나 장염에 걸려서 입양이 되지 않았고, 만약 우리가 파양 하게 된다면 안락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래서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세상을 홀로 남겨진 강아지, 형제들과 부모견들과 어떤 삶을 지넀을지, 어떻게 떠돌다가 구조돼서 들어온 건지 모르지만 구조되야만 하는 삶, 그런 삶이라 눈길이 갔다. 

누군가에게 구조되어야만 했던 삶. 그리고 아프다는 이유로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 아프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아픈 것이어서 더 아이에게 마음이 갔는지도 모른다. 떠돌이 견과 떠돌이 인간의 만남. 어느 곳에서도 완전하지 못하고,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존재감 없는 떠돌이 존재들. 그리고 누군가 구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렇게 우린 각자의 세계를 떠돌다가 서로를 발견했고, 내가 멈뭄이를 구한 것 같지만, 사실 멈뭄이가 나의 삶을 구했다. 삶의 힘든 순간순간마다 너는 나를 구조했다.



모두를 구(조)한 삶

한 생명을 사랑할 때 비로소 세상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난 무게의 마음에 책임을 지는 일이라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리고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주고 싶은 마음, 지켜줘야 할 생명들에 대한 마음까지도. 내가 지켜야 하는 존재 덕분에 더 많은 존재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특별히 여성의 인권에 관한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주제는 바로 동물권이라는 동물에 대한 권리였다. 동물권에 대해서 잘 모르던 내가 사랑하는 동물친구가 생기면서 동물권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고, 알아가면서 내가 지켜내고 싶은 이들에 대한 실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실천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비거니즘'이었다. 실제로 비건을 알아가기 위해서 읽었던 책에서 누구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부터 비건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작가님의 말이 내 마음을 울렸다. 내가 연결된 존재에 대한 관심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되었고,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생명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들을 볼 불편한 용기를 주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먹이'였던 존재를 '생명'으로 마주했을 때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아 살아있는 이들이구나, 살아서 나처럼 숨 쉬고, 살아 마땅한 이유가 있는 존재였구나. 이 이야기에 반박을 하자면 "그들은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없고,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없다. 물론 동물들도 서로를 먹고 먹는 관계 속에 있지만, 일부러 고기로 생산되는 것은 아니며, 고기로 길러지는 것도 아니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며, 생명으로서 어떠한 존중과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도 아니다. 좁은 우리에 갇혀 누려야 할 마땅한 삶을 착취당한 채 죽음만 기다리며, 인간에게 사용되고, 착취되고 버려질 존재로 이용 당하진 않는다. 죽어도 되는 인간이 없듯이, 죽어도 되는 동물도 없으며 죽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 생명은 모두 동등해야 하고 존엄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무해하기를. 아프지 않기를. 사랑해서 지켜주고 싶은 것들에 나는 용기를 낸다. 먹지 않을 용기, 조롱하고 비난하는 말들에 흔들리지 않을 용기, 그리고 나의 힘을 보태야 할 때 그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을 보탤 용기, 내가 나의 반려견에게 받은 사랑의 영속성이고 그 사랑으로 모두를 구(조)하였다.



우린 같이 살 거야

멈뭄이 곁에서 운다거나 멈뭄이를 끌어안고 울 때면 멈뭄이는 우는 나를 부둥켜안아주진 못하지만 내가 부둥켜안고 울을 수 있는 품이 되어준다. 서로 맞닿은 온기가 말이 주는 위로보다 더 큰 언어라는 것을 멈뭄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멈뭄이에겐 가만히 내 곁에서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는 것이 '위로의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멈뭄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털에 파묻히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둘만의 온기를 나눈다. 그 온기엔 삶을 다독이는 마음이 있다. 특별히 멈뭄이는 내가 울 때 눈물을 핥아준 적도 있다. 아픈 어둠 속에서 홀로 울 때 누군가 나의 눈물을 닦아준다면, 그것은 살라는 것이다. 여러 번 죽기를 다짐했던 밤 아직도 인상 깊은 장면은, 죽겠다고 울고불고하던 내가 뒤를 돌았을 때 나를 오롯이 쳐다보던 멈뭄이의 눈빛이었다. 멈뭄이의 눈빛이 나를 향했고,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같이 살자" 그 눈빛에 죽을 수는 없었다. 내가 멈뭄이를 처음 사진으로 만났을 때, 철장 안에 갇힌 멈뭄이의 간절한 눈빛, 살기를 바라던, 구해달라던. 멈뭄인 나에게 간절했다. 우린 서로에게 절실했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있구나, 세상에서 나만 없어지면 된다는 어긋난 마음들이 파편이 되어 나를 찌를 때 나를 꼿꼿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같이 살자고 한다. 그렇게 엉엉 울던 내게 멈뭄이는 다가와 눈물을 핥으며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나는 살아야 했고, 그 이후로도 지구별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지구별에 남겨둔 친구 때문에 떠나지 못했다. 지구별에 남겨둔 친구가 홀로 남겨지게 될까 봐. 네가 나를 하염없이 기다릴까 봐. 내가 전부인 너를, 나에게 전부인 너를 차마 두고 떠날 순 없어서 살기로 작정을 한다. 사랑으로 연결된 존재로 인해 위태로운 나의 삶은 하루하루 목숨을 영위한다. 그래 너의 존재는 내게 살아달라는 신의 구원이었어. 그래, 우린 같이 살 거야


너의 눈에 나의 구원이 있다 - 자작詩

이 세상, 날 바라보는 수많은 눈 중에

나를 비난하지 않는 재단하지 않는

전부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세상 온갖 고난을 녹여내는

따스한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위로라는 것을 온몸으로 누빈다


털 뭉치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모든 절망 속에서 벗어나

너와 나만 남은 우리 둘만의 안식,

누구도 줄 수 없는,

어떤 불안과 고통으로부터도

뺏길 수 없는 영롱한 고요를 누린다.


이 모진 세상에

우리 둘만 있으면 돼

숨을 수 있는 숨,

품에 안기는 품

그 품에 파묻힌 채 운다,

웅크린다,

다독인다

세상의 서러움을 너는 달랜다.

나는 네게 매달린다


우는 나를

너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감싸 안으며

눈물을 핥는다.

더는 울지 말라는

너의 언어

울어도, 괜찮다

너의 언어로 닦아내는

눈물은 외롭지 않다.


울컥울컥 눈물을

흘려대며 마지막을 준비하던 어느 밤

밑으로 추락할 나의 영혼을 기리려던 참에,

뒤를 돌았을 때,

나를 한없이 바라보던

너의 올곧은 눈


터져버린 울음

그리고 죽지 못했다.

너를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엉엉 우는 곁에서

핥으며 다독이던 넌,

살라고 했다. "그래도 살아줘."


내겐, 네가 전부인걸.

전부인 서로를 두고, 혼자서 떠날 수 없어서

너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버텨낼 삶을 움켜쥔다


나의 삶이 너에게 붙들렸고,

붙들린 삶은 더는 죽지 못한다.

살아서, 네 곁에 있는 것이 내 삶의 이유가 된 밤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너는 나의 영원이다.

그 밤, 암흑 같았던 어둠 속에서

내던지려던 위태로운 그 끝에 걸친


날 바라보는 너의 눈에, 나의 구원이 있었다.


한 생명체가 비련 한 존재를 끌어안는데,

너덜 해진 삶을 끌어안는데 절망을 메꾸는 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엎어서


애처로운 밤에 나눈 체온과 눈빛은

구원과도 같은 사랑이었다.


보드라운 숨결을 끌어안는 것,

내 삶을 파고드는 너의 털 뭉치를 안는 것,

세상에 사랑할 생명들을 안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

어떤 생명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는 것

달라진 삶의 형태 속 생명들을 끌어안는다

온전하게 내 삶에 스민 너의 사랑,

내 삶에 너의 온기가 퍼져 들어

불안하고, 아프고, 괴로웠던 세상에

함께 웃고 싶다는 희망을 피워낸다,

내 삶에 파고든 너의 숨결,

내 일상에 스며든 너의 시간

너와 맞닿은 체온이 함께하는 그곳이 사랑이지.


내가 너를 구한 것 같지만,

사실 네가 나를 구한 거야.

유기견 같이 외면받고 떠돌던 내 삶을 구한 거야.

내가 너를 발견한 건, 네가 나를 발견해준 거야.


우린 서로의 삶을 발견해준 거고,

우린 서로의 삶을 반겨준 거야


흔들림 없이

올곧게 나를 향하던 너의 눈은

내게 함께 살자는,

나의 구원이었다.



우릴 구(조)하면 내 삶을 구한 거지

"너의 삶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네가 무슨 동물을 구하냐, 너나 구해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것도 남편에게)

그 순간 내가 내 삶 하나 구하지도 못하면서 동물을 구한다고 설쳐대는 것인가 하는 깊은 자괴감에 빠지고 무력해졌다. 나는 동물을 구하려는 영웅이 아니다, 내 삶 하나 못 구하면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나는 누군가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지키려는 것이고,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곁에 서고 싶은 것이다. 나는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곁에 서려는 것이다. 곁에 선다는 것이 나에겐 지금은 미약하게나마 작은 비건의 실천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먹지 않음으로써 한 생명이라도 먹히지 않는다면 그것이 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고. 나는 내가 나를 구하진 못하지만, 내 삶 하나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겐 구원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삶을 구할 용사는 아니야. 다만 어느 누구도 아프지 않도록 무해한 삶을 살 거야. 그게 나에겐 나도 구원받는 일이니까." 


우리 서로를 구하자. 이 아픈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약한 존재들이 도살되고, 살해되고, 폭행당하며
무자비하게 죽임 당할 때 우리만큼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자. 서로를 껴안고 살아내자.



삑삑이 공이 구한 행복

내가 우울해지거나 힘들 때면 어김없이 저쪽에서 들리는 삑삑이 공 소리. 멈뭄이는 내가 우울해질 틈을 주지 않고, 삑삑이 공을 던진다. "이거나 던져라 닝겐" 삶을 산다는 게 때론 너무 버겁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이처럼 가벼울 수 있다. 아니 멈뭄이를 통해 가벼워진다. 멈뭄이와 공을 던지고, 삑삑삑 소리에 맞춰 공놀이를 할 때면 나는 아이같이 마냥 즐겁고 내가 더 신나 할 때도 있고, 다른 나쁜 생각이 들지 않도록 멈뭄이가 날 더 강하게 키운다. 계속 공을 던지라고, 공놀이를 멈추지 말라고. 어쩌면 멈뭄이와 하는 공놀이가 나의 삶 전부를 버티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 놀자고. 삶을 멈추지 말자고. 온전하게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누린다.

  우리에게는 공놀이를 할 친구가 필요하고, 삑삑이 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삶으로부터 가벼워질 수 있는도록. 온전히 즐거울 수 있도록. 우울해할 틈이 없도록 말이다. 삑삑이 공이 잃었던 나의 행복을 구했다. 우울로부터 나를 구조해낸다. 우울해서 쳐져있지 않도록, 늘어져 있지 않도록 쉴 새 없이 삑삑이 공이 울려댄다.

삶을 무겁게 살지 말고 뭄이와 공놀이하듯 산다면 오늘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고 내일 살아낼 힘도 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가볍게 공놀이하듯 삶을 즐겨보자. 내가 우울 속에 파묻힐 때 삑삑이 공을 물고 와 어서 던지라고 재촉하는 귀여운 악동이 곁에 있으면 삑삑이 공으로도 충분하다. 행복은 비로소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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