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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Oct 28. 2022

지금은 개 키우고 살 때


"지금 개 키우고 살 때냐?"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개 키우고 살 때냐?"(낳으라는 아이는 낳지 않고…)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말'은 처음에는 소화가 안되었는데 우습게도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라 냅다 수긍했다.

아버님은 뒷목 잡으실지 모르겠지만 '지금이야말로 개를 키울 때다'라는 다부진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딩크로 살고 있고, 돈을 벌고 있고, 개를 양육하기에 적합한 환경과 요건을 지닌 지금에야 말로 개를 키워야 하는 때가 아닌가(웃음)


무엇보다 지금은 "개를 키워서 좋은 때"이다. 뭄이를 통해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살아 있는 하루'에 대한 긍정이다. 살고싶지 않은 날을 묵상하며 살아온 나에게 '살아 있는 하루'가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뭄이를 만나고서부터이다. 뭄이를 통해 하루하루 잘 버텨내며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살아있는 것의 감각은 뭄이와 산책을 하고 놀이를 하며 역동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뭄이와 관계를 맺으며 관계적으로 다가오고, 뭄이와 몸을 부비며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감사일지를 쓰라는 엄마의 명령(?)에 뜻하지 않았지만 감사한 일들을 적어가고 있는데 거의 반이 뭄이와 관련된 것이다. 뭄이가 있어서라든가, 뭄이랑 함께 하는 것들에 관한 내용들.

뭄이 덕분에 내 삶에서 감사들이 발굴되었다. 어둠뿐이었고 온기 없이 적막하던 내 삶과 마음에 찾아온 뭄이는 나의 어둠을 자신의 존재로 밝히고 품 안에 안긴 뭄이의 따뜻한 온기가 삶에 스며든다. 적막한 삶에 나타난 놀이와 산책은 꽤나 큰 움직임이다.

아기와 잘 놀아주는 모습에 '아기랑 잘 논다'는 칭찬을 받은적이 있는데 무심코 "제가 개랑 잘 놀아주다보니"라고 말했다. 순간 아기랑 개를 같은 선상에 놓은 걸까? 하고 아찔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뭄이와 숙련되어 있어서인지 아기랑 놀아주는 것이 일상적이고 편했다. 

뭄이는 나에게 놀자고 발로 툭툭 칠 때가 있는데 그것이 힘내라는 뭄이의 격려로 느껴질 때가 많다.(놀자는 뭄이의 행동은 힘을 내서 놀자는 위로로 바뀐다.) 내가 지쳐있거나 널부러져 있을 땐 뭄이가 나에게 호되게 짖으며 무너지지 말라고 나를 강하게 키운다. 그래서 나는 나태해지거나 허튼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뭄이의 "놀자"는 말(?)은 나에게 "살자"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살아야 뭄이와 놀 수 있고, 내가 뭄이와 놀 때 뭄이에게 받는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고, 뭄이가 행복하다면 나는 그것으로 행복하니까. 지금이야말로 개를 키우고 살 때라는 확신이 든다.


해치지 않아요

개는 인간의 스트레스를 알아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삶에서 느끼는 부분이었다. 회사에서 지쳐서 돌아왔을 때 뭄이를 껴안거나 뒤에서 안으면 뭄이는 가만히 나에게 안겨 있다. 평상시 뭄이는 활동량이 좋아서 누워있거나 내가 안으려 하면 기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맙게도 내가 힘들때나, 내가 지쳐 있을 때, 피곤할 때에는 가만히 자신의 품을 빌려주고, 나의 품 안에 안겨준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결속. 

가장 아플 때, 아픔 속에서 누군가 내 곁에 있어줬으면 간절히 바랄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존재. 아픔 속에 나와 함께하는 존재가 주는 위로가 무척 갈급했었던 나에게 뭄이는 절실하다. 

그동안 살기 위해 붙잡았던 것들이 나를 해치는 것뿐이었다면 나를 해치지 않는 사랑을 뭄이를 통해 배웠다. 나를 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었던 적이 있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사랑을 확인받고자 했고 동정을 얻으려 했다. 이런 내게 사랑은 아파야 하는 것이었고, 아파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뭄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뭄이가 아픈 게 너무 아프고, 내가 아프면 뭄이가 아프다는 것이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 사랑은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해치지 않는 거구나. 사랑은 서로에게 해롭지 않은 것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이제 아플 수 없을 것 같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

다른 직원과 함께 길을 가다가 비둘기가 푸드덕 대며 갑자기 날아 올랐는데 다른 직원은 화들짝 놀래서 기겁을 했다. 그에 반해 나는 너무 의연했던터라 그 직원이 내게 "뭄이를 통해 많이 단련되셨나봐요."라고 했다. 실제로도 뭄이를 통해 단련되는 마음의 근육, 생활의 근육들이 있다. 

비둘기를 보거나 비둘기가 푸드덕 날아 오를 때 놀라지 않는다던지, 갑자기 뭐가 튀어나온다던지 무서운 물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뭄이랑 산책을 할 때면 내가 의연해야만 뭄이가 겁먹지 않고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뭄이를 위해 더 의연해지고, 강해지려 한다. 오토바이 소리, 갑자기 튀어나는 사람, 막 뛰어드는 사람. 때론 이런 사람들은 나도 무서울 때가 많은데 뭄이에겐 특히나 공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겁먹지 않아야만 뭄이와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뭄이와 다니면서 늘 서로에게 해롭지 않은 것,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한다. 뭄이가 몸집이 크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하는 부분들이 많은데 때론 그런 것들이 버겁게 느껴지다가도 큰 몸집의 뭄이 덕분에 더 조심하고 더 신경쓰고, 주의하는 부분들이 우리를 이롭게 한다. 이로운 민감성이랄까?

가끔 산책을 하다보면 핸드폰을 하면서 산책을 하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곤한다. 나는 꿈도 꾸지 못하는 모습이라(나는 어떤 때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니까)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한시라도 마음을 놓아선 안되는 것, 괜찮다고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배려의 마음이 된다. 이전에 너무도 작은 강아지와 마주쳐서 뭄이를 안고 작은 강아지가 조심히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비켜 서 있었는데 견주로부터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이거구나 싶었다. 그분도 나의 마음을 알아봐주셨고 나도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서 고마웠다. 타인을 향한 민감성이 위하는 마음이 되고, 배려가 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이라는 두둔

"매우 인격적으로 대해주신다"는 말자체가 그렇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전 직장의 직원언니가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상사가 새로운 직원들에게는 매우 인격적으로 대우를 해줘서 좋아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최근에 "또" 전해주었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해들을 때마다 상처를 마구 헤집는 것 같아서 아프고 착잡하다. 그는 왜 우리에게만 모질었을까 싶다가도 이전의 상황과 달리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자신이 사장 다음으로의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을 때 굳이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갈구거나 못살게 굴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만 왜 아팠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나는건 아니다. 우리에겐 모질기만 했던 사람이 인격적이라는 두둔을 받기 때문에 화가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지 언니(이 언니도 퇴사를 했다)에게 말했더니 아직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가보라고 했지만 그가 인격적이라는 말은 그의 비인격적이었던 언행과 행동들이 비호되는 것 같아서, 다 지난일이라고 인격적으로 미화되는 것같아서 당한 사람에게는 폭력적으로만 느껴졌다.

우린 서로에게 과연 인격적일까? 사람들한테 데일 때마다 그렇다. 일을 하면서 같은 운동을 하고 같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도 같은 선상에 서로에게 함부로하는 것을 숱하게 경험했다. 그런 것에 상처입고, 억압에 저항하면서도 또 억누르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그럴 때마다 동물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래서 비건이 된 것도 후회되지 않았다. 사람보다 동물이 더 좋았으니까. 나에게 동물만이 이로웠으니까.

사람은 때론 미화가 되지만 동물은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게 좋다. 자기를 돌봐주던 사람이 죽자 원숭이가 장례식에서 그를 만져주고 보듬어주는 모습을 기사에서 보았다. 인간이 자기를 버려도, 끝까지 사람을 버리지 않고 따라가고 기다리는 한결같은 마음. 그 마음은 변하지 않고 주인을 향하고, 자기를 향한 사랑에 전부를 건다. 나는 그런 동물의 진실한 마음에서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덮는다. 

용서할순 있어도 그를 미화하진 말자. 자기가 키우던 동물을 버리는 사람들이 "사정이 어려워서요"라고 말한다고 했을 때 그의 사정은 이해받지 못한다. 어쨌든간에 버린 것은 잘못이니까. 어쨌든 간에 아프게한 건 잘못이니까. 버림받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고, 상처받은 내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 무엇이든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선 용서받지 못할거라는걸. 

분노를 달래려 뭄이를 안고 세상이 모질어도 유일하게 모질지 않은 뭄이에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뭄이를 만나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되뇌인다. 나를 바라보는 맑고 순수한 눈빛에 순수하지 않은 마음들을 씻어낸다. 

두둔 받는 마음이 있을 순 있지만 나를 감싸주는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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