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부정할 때에도 자신을 지키는 힘
"내가 봐온 너는 할 수 없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시아버님으로부터) 들었다. 갈 길을 놓고 고민하는 와중에 걸려 넘어뜨리는. 돌부리엔 그럴싸한 조건이 따라붙었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는 '체질'이며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없다는 본인 나름 내린 타당(황)한 결론.
대체 자신이 '봐온 나'는 누구일까? '봐온' 내가 '나'로 정의될 수 있는 걸까? 내가 아닌 자신이 규정지은 존재를 매달아 두고 어긋난 잣대로 마구 깎아내리는 것이 불쾌했다. 존재의 무게가 누군가에게 가볍게 판단되고 측정 가능한 걸까. 그 말을 들은 후 소설의 한 구절처럼 "곱씹을 때마다 차갑고 따가웠다"
그 말의 의도가 어떻든 그런 말들은 불순하다. 어렸을 때부터 타의로 강요된 선입견 속에서 타인이 규정지은 누군가의 딸로서. 들어야만 했던 숱한 말들은 심장을 흠집 냈고, 어린 나는 고스란히 그 말을 흡입하여 기이하게 커버리고 말았다.
"너는 꿈이 뭐니?"(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는 거니)라는 말을 들은 날부터 비뚤어진 마음에 꿈이란 걸 꾸지 않게 되었고. "너는 그런 것조차 혼자 하지 못하냐"는 말에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없이 무력해졌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고, 다만 스스로에게 상처를 낼 때서야 '괜찮다'라는 말을 들려주곤 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에, 어떤 꿈을 꾸는 것에 '체질'이라는 조건이 필요한 걸까? 그런 굉장한 체질을 가지면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걸까? 세상이 규정해놓은 '체질'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싶다.
활동가로서 "너는 운동성이 없다"라는 말을 초반에 들었던 적도 있다. 활동가에겐 처참한 평가이다. '나는 이 일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채기를 냈다. 직접 상해를 입히는 것보다 어떤 말들은 더 악질적으로 상처를 내고 괴롭힌다. 적극적인 성격에 카리스마가 있고, 타고난 외향성에 수동적이지 않아야만 운동성인 걸까? 그들이 내린 정의는 개인이 가진 특별한, 특수의 가능성을 짓밟는다. 어떤 일을 꿋꿋하게 해내는 것,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 단단하게 자신을, 그리고 자기가 지키고 싶은 가치들을 지키는 것도 운동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특화된 운동성을 내보일 수 있다고 믿는다. 계속해서 살아가고, 자신이 하는 일을 끝까지 추진해나가는 것이 운동성이 아니면 무엇일까.
예전에 세균 중에 비운동성 세균이 존재하다는 것을 읽었는데 그들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무작위적으로 움직이곤 있는데 세균 운동으로 쳐주지 않는다고 했다.(내가 다 서럽다) 무작위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면 운동이라고 우리끼리는 인정해주자. 세균에게 묘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낀다. 미약해도 나름대로 움직이며 살아 있는 존재들이 깃발 꽂을 때도 있지 않을까? 무한한 존재들의 힘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뭄이에겐 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것이 나에겐 무조건적인 지지가 된다.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못하든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뭄이에게는 그저 유일하다. 누군가에게 유일하다는 것이 무조건적인 지지로 다가온다는 것을 뭄이를 통해 깨달았다. 뭄이는 나를 탓하지 않고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든다.
뭄이와 산책을 하는 것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타인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적당한 거리라든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마음. 그리고 나의 조급한 마음이나 두려움이 산책을 할 때 뭄이에게 고스란히 반영되니까 내가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고, 의젓해야 한다. 산책을 잘 수행하고 나면 뭄이는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놀 때도 마찬가지다. 뭄이가 지칠 때까지 놀아줘야 뭄이는 만족해하며 혀가 바깥으로 튀어나온다.(혀가 튀어나오면 정말 놀만큼 놀아서 지쳤을 때다) 무조건적으로 쏟아붓는 애정만큼이나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지하는 마음은 비례한다. 뭄이가 나를 신뢰하고 나를 따라주는 것, 내가 있는 곳에 항상 (자신의 자리에서) 그 곁에 함께하는 것.
힘겨운 출근을 앞두고서는 모든 준비하는 내내 뭄이는 뭄이만의 방식대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내가 출근 전 뭄이를 꽉 끌어안고 기운을 받으려 하면 뭄이는 자신을 온몸으로 내어준다. 그게 나를 향한 전적인 지지가 된다. 내가 어떠한 훼방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도록.
지친 하루를 보내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끌고 집에 오면 귀빈급 격한 환영을 받는 것도 나에겐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극찬이기도 하다. 나를 특별한 존재로 모든 순간마다 대해주는 뭄이가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낸다. 나를 탓하지 않는. 내게 무해한. 나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을 할 때에 잘 될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다. 나에겐 대게 기획단계에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획단계에서만 꿀 수 있는 꿈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저조한 참여 숫자를 맞이하니까. 최근 들뜬 마음으로 준비한 프로그램에서도 3명이지만 1명과(비디오와 마이크를 켠 사람은 1명뿐이었다) 진행했고 이번 프로그램도 이슈에 맞물려 참여자가 몰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대를 비웃듯 신청자는 0명뿐이었다. 그 뒤로 상사에게 탈탈 털렸다. 처참한 결과는 늘 나를 탓한다. 홍보를 여러 방면으로 하지 않은 탓, "그렇게 재고 따지고 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를 탓한다. 나는 마구 너덜너덜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들이 봐온 내가 맞는 건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며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모든 것이 망했다"라고 이야기하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망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해보라."라고 했다. 망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망한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가 유일하게 내놓은 말은 "강아지 산책을 매일 빠짐없이 해요."라고 이야기했다. 산책에서만큼은 망하지 않았다.
무력감에 빠져 좌절의 나락에서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무너져갈 때, 내가 그래도 하는 것,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려 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이때도 생각나는 게 하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떠지지 않는 눈을 떠, 힘든 몸을 이끌고 한 일. 뭄이 산책시키기. 특별히 오늘은 아침에 짧은 등산을 했다. 노트에 적어놓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들 때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기.. '나는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라고 쓰여진 말이 확신이 된다.
그래, 나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는 있구나.
다 망한 듯 보여도, 참여자들이 호응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나라도, 나에게 호응하는 뭄이가 있고, 내가 진행하는 산책 프로그램에 늘 참여해주는 뭄이가 있구나. 그냥 잘한 것만, 내가 오늘 한 것만 생각하자. 내가 오늘 한 산책만 생각하자. 오늘 힘겹게 산을 오르던 것만 생각하자. 되뇌었다.
오늘 뭄이는 질질 끄는 카트 소리에 기겁을 하며 놀라 계속 전력질주를 했다. 뭄이에게 카트 끄는 소리는 두려움과 공포였나 보다.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 뭄이를 줄로 놓치지 않기 위해 꽉 붙잡았다. 그러곤 내 팔에 묶인 줄에 안도했다. 나는 침착하려 애썼다. 두려워하는 뭄이를 지켜주기 위해. 온 무게중심이 나에게 쏠렸다. 내가 지탱해줘야, 내가 버텨야만 뭄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버티기 위해, 쓰러져가는 나를 지키기 위해 무게중심을 내가 한 것에 기울인다.
모든 게 나를 탓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나에게 훼방을 놓을 때. 유일하게 내 존재에게 기를 불어넣어 준다.
유일하게 한 것
뭄이와 한 산책
뭄이와 한 산책
나는 못하지 않는다. 나는 한다.
나는 산책을 한다.
무기력에서 나와 글을 쓴다.
무언가를 안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는 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산책을 할 때 가장 기뻐하는 웃음을 기억하려 애쓴다.
너의 해맑은 웃음으로, 일그러진 나의 세상이 해맑게 웃듯 무너질 것만 같은 나의 모든 일상에 너의 웃음이 스민다. 무조건적인 지지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만 같은 날에도, 나에도 용기가 된다.
0명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