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형견과 도심에서 공존하기
중대형견을 기른다는 것은 숱한 혐오와 공격에 맞서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뭄이를 만나기 전까지 몰랐다. 중대형견을 기르기 때문에 늘 조심하고, 철저해야 하는 부분에서 주의한다. 그럼에도 가끔 짖기라도 하거나 하면 더 꾸지람을 듣고, 평범하게 산책을 하는데도 욕을 먹을 때가 많다. 중대형견들을 기르는 여자 견주들은 산책 때마다 이런 욕과 시비를 많이 당한다고 한다. 입마개를 해야 한다는 것부터(입마개를 해야 하는 견종이 아님에도) "이런 개는 데리고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왜 '이런 개'는 밖에 나오면 안 되는 거지? 중대형견은 밖에도 나올 수 없고 안에만 있어야 하는 건가? 해를 끼치지도 않았음에도 듣게 되는 말들이 오히려 더 해롭다. 어쩌면 (입)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 하는 건 '이런 말'아닐까.
"이 개는 시골에서 묶어 놓고 기르는 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시골에서 기르는 개가 따로 있고, 도심에서 기르는 개가 따로 있는 걸까. 묶인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믹스견, 특히 중대형견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인해서 입양이 되지 않고, 안락사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많이 본다. 중대형견들은 보호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몸집이 커지면 유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큰 개를 어떻게 키워요?" 나는 뭄이가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지만 뭄이가 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키우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뭄이가 받을 차별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뭄이를 데리고 나가면 "귀엽다"는 얘기도 많이 듣지만, "무섭다"는 이야기도 그만큼 많이 듣는다. 크기 때문에 두려움이 대상이 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뭄이를 보고 사납게 소리 지르는 경우도 있다.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들과 사고에 대한 대비를 늘 염두에 두고 조심하고 더 애쓰는데도 아무런 죄 없는 뭄이를 욕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에는 담담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영화 <한산>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거북선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한다. 나는 다만 거북선 같은 단단한 마음을 갖고 싶었고 우리 뭄이는 '뭄카이센'(거북선을 왜군은 복카이센이라고 불렀다)이라 불러주고 싶다. "뭄카이센,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자."
멈뭄이를 지키기 위해서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애를 쓰는 마음이 있다.
일부러 사람들이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산책을 다닌다. 늦은 밤 10시 이후나 새벽 5-6시에 산책을 한다. 어린아이, 어르신들,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세워놓고 단단히 목줄을 꽉 잡는다. 우리의 마음도 단디 붙잡는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되지만. 어쩌면 시골 생활이 뭄이에게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뭄이와 시골을 뛰노는 상상을 한다. 사람을 피해 다녀야 하고 죄지은 것처럼 위축되는 도심이 아닌 곳에서. 그렇다고 해서 뭄이가 엄청 큰 대형견도 아닌데도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진돗개들, 진도 믹스 아이들은 얼마나 더 큰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바라기는 중대형견도 도심에서 같이 공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개'도 바깥에 나올 자유가 있으니까. '이런 개'도 충분히 도심에 살 수 있고, 같이 살 수 있다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지켜줄 순 없는 걸까. 개 물림 사고로 인해 모든 개들을 다 욕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같이 공존해서 살 수 있도록 지켜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늦은 밤, 이른 새벽 뭄이와 산책을 하면서 매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더 넓은 세상을, 마음껏 들판을 누리게 해주지 못해서, 네가 밟는 땅이 너무 한정적이어서 네가 좋아하는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 가로수뿐이라서. 그래서 뭄이와 하는 등산을 즐긴다. 뭄이가 산에서 자유로이 냄새를 맡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으니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피해 다니지 않아도 등산로는 넓으니까.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걷고 있다면 우리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으면 되니까.
너와 같이 걷는 길은 구불구불해도, 잘 되어진 테크 길이 아니더라도. 뭄과 함께 밟는 땅이 내가 밟는 땅 중에 가장 단장된 길이다. 어디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정돈된 마음을 너와 함께 누리고, 모든 어지러운 생각들이 정리되니까. 그래서 욕을 먹고, 시비를 당해도 우리가 산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누워만 있을 내가 유일하게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건 뭄이다. 산책은 뭄과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순간이다.
우린 이렇게 서로를 이끌어주며
갖은 시비를 당하거나 뭐라 해도 꿋꿋하게 걸어간다.
너를 품는 이 도심이 작은 거라고.
너를 품을 이 세상이 작은 거라고.
뭄이가 큰 것이 뭄이에게도 나에게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뭄이가 아플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몸이 크기 때문에 괜찮아요'였다.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뭄이가 몸이 커서라고 했다. 몸이 큰만큼 너는 어떠한 고통도 잘 이겨내고, 잘 버텨낼 수 있다.
너와 난, 세상에서 차별적 시선에 맞설 큰 몸이 있고,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을 품을 마음이 있다.
뭄이와 나는 외모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사실 서로의 처지도 닮았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존재.
그렇지만 우릴 품는 세상이 작은 거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로의 존재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우린 서로의 전존재를 받아들인다. 이 세상이 너를 품지 못해도, 내가 끝까지 너를 품을게.
너를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네가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지켜줄게.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 서로 지켜줬으면 좋겠다. 뭄이가 있는 존재 그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나의 욕심일지라도.
이 세상에 많은 중대형견들이 보호소에서 생을 마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대형견도 같이 공존할 수 있다고, 자신들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이 너를 품기엔 너무 작은 거야.
너희들의 존재가 너무 큰 거야.
소형견들도 중형견들도 대형견들도 모두 사랑받기에 마땅하다. 함께 지켜줄 수 있는 세상을 뭄이에게 조금 더 보여주고 싶다. 그만큼 더 노력하고, 네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 늘 주의하고 있다.
우리도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덜 욕먹었으면 하는 작은 소원이 있다.
고요히 잠든 너를 보며 되뇐다.
네가 마구 뛰놀아도 될 만큼 넓은 곳에서
뛰노는 꿈을 꾸라고.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너에게 더 넓은 세상이 될게.
너를 지킬 수 있도록 더 단단해질게."
우릴 품는 세상이 작을 때,
우린 넓은 몸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잘 버텨낼 거라고 서로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