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런 날이 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거나
한 번도 안 해본 실수를 연발하거나
오늘 내가 딱 그랬다.
인스턴트커피 하나 태우는데도
정수기 주변에 한강을 만들어 놓칠 않나
물 한 컵 잔뜩 받아와서는 컴퓨터 책상 위에 놓는다는 걸
시원하게 엎질러 버려 계획에도 없는 책상 물청소를 하질 않나
세탁기 안에 대충 물청소 하고 분명 수도꼭지 잠겄는데
세탁실 물바다 만들어버리질 않나
아무튼, 오늘은
물귀신한테 KO패 당했다.
쏟은 커피를 닦을 때 까진
실수였으니 이 정도는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가볍게 나를 꾸짖었다
' 이 년아.. 아이고 이년아...'
컴퓨터책상에 널브러진 물이
컴퓨터 본채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걸 보며
나에게 욕을 퍼부었다.
' 지랄 염병도 가지각색으로 한다 '
얼른 마른걸레를 들고 와 닦는데
다행히 컴퓨터 본채 위에 책과 노트만 젖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책상이나 정리해야겠다 싶어
오랜만에 뽀얗게 먼지 앉은 책상과 모니터, 키보드를 닦아냈다.
어라?
깨끗한데?
꽤 기분이 좋은데?
비록 물은 쏟았지만 본체도 멀쩡하고
덕분에 책상이 깨끗해졌네?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바다가 된 세탁실을 마주할 때
저 밑에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함 짜증이 폭발하려는 찰나,
크크크 웃어버렸다.
그래, 꽃가루 때문에 더러웠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됐다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되려 오래간만에 하는 물청소로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마저 들었다.
어차피
성질을 내도 내 마음이 화가 나고
허공에 쌍욕을 퍼부어도 내 귀가 들을 거고
내가 하는 거 다
오롯이 내가 다 받는 거니까
내가 나한테 만큼은
덜 짜증 내고 덜 화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앞으로 살아나갈 많은 날들이
내 계획과는
내 의지와는
내 소망과는
반대인 날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건
오늘 내가 커피 쏟고 물 쏟고 물바다 만든 게
내 계획과 내 의지와 내 소망이 아니었기에
나는 오늘
합의를 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죽을 듯 악쓰며 버티지 않기로
내 마음은 내 거니까
적어도 나한테 만큼은 좀 너그럽기로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