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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서 Sep 24. 2024

나도 힐이란 걸 신고 싶어


성인이 된 후부터 7센티 이하 구두는 취급해 본 적이 없었다. 

운동화를 꼭 신어야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늘 힐을 신고 다녔다. 

키가 160cm이 겨우 될까 말까 했기에 힐은 내 자존심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식당에선 까치발을 들고 들어갈 만큼 유난을 떨었던 나였다. 


허나 임신을 기점으로 신발장의 신발은 모두 바뀌었다. 

힐은 손이 닿지 않는 맨 위로 치우고 온통 운동화로 가득 채웠다. 

언젠가 신겠노라 고이 모셔둔 힐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신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둘째가 3개월쯤 되던 그날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첫째 어린이집 등원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고 표현하기엔 행색이 초췌했다.


퍼석하게 메마른 얼굴에 핏기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회색인간.

입술은 건조하고 거칠게 굳은 입술 껍질은 허여멀겠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정말 문이 천천히 열린 건지 내 눈에 슬로우가 걸린 건지 알 순 없지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문이 천천히 열렸다. 


향수 냄새가 진했지만 상쾌한 향이 신선했다. 

까맣고 긴 생머리의 그녀가 걸어오더니 뒤돌아 내 앞에 멈춰 섰다. 

백화점 1층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화장품 냄새였다. 


나도 모르게 한쪽 어깨를 들어 내 옷에 코를 갖다 댔다.

분유 냄새가 났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향수 냄새 샴푸 냄새 화장품 냄새

좋은 냄새는 다 섞였는데 여하튼 좋은 냄새를 풍기며 

또각또각 구두소리 내며 걸어 나갔다. 


‘나 왜 이리 초라하지?‘

코끝이 쟁하며 저렸다.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차오르긴 했었다. 


그녀의 어디가 부러웠을까? 좋은 냄새가? 또각또각 구두소리였을까?


그보다는 출근하는 모습이,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구두를 신고 나갈 수 있는,

눈 뜨면 정해진 어딘가에 가는 그 평범했던 내 모습이 그리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게 되는 벅찬 행복함과 감동적인 순간들을 

고작 몇 가지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힘듦과 고단함도 있다. 

내 시간이지만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시간.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어른 대화.

그렇게 점점 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어 가는 느낌이 생경했다.


이럴 땐 조리원 동기만 한 것도 없다. 

남자들의 전우애와는 농도부터가 다르다. 


조리원 동기애는 조리원 퇴소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정보 공유는 물론이거니와 남편욕부터 시댁욕까지 공유한다. 

내 일처럼 욕해주고 편 들어주니 친정 언니가 생긴 기분이다.


조리원 동기, 줄여서 ’ 조동모임‘은 한 두 달의 한 번은 필수다.

한번 나갈 때마다 짐보따리는 왜 이렇게 많은지

기저귀에 젖병에 분유, 보온병은 짐도 아니다. 

혹시 모르니 여벌 옷과 손수건, 가는 길에 울지 모르니 장난감도 챙겨야지, 

아 맞다! 아기과자. 깜빡할 뻔했다. 

뺄 거 다 빼고 간소하게 챙긴다고 챙겼는데 

이 짐보따리는 뭐냐고...


이런 파이팅도 둘째가 태어나니 없어졌다. 

우스갯소리로 둘째 키울 때는 산후우울증이 생길 틈조차 없었다. 

평일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밤이고 낮이고 독박으로 아이 둘을 케어하려면 

숨만 쉬어도 버거웠다. 


이제 둘째도 어린이집 보내면 사람처럼 살겠지? 희망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로 또다시 좌절했다.



첫째도 많이 컸고 둘째도 내년에 초등학생이니 이제야 좀 한숨을 돌릴만했다.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졌고 빈 시간엔 일도 했다. 

겨우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그때 불현듯 찾아왔다. 

번아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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