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부시장 운전수
아버지는 가끔 초등학교 행사에 오셨다. 시내에 있는 초등학교라 시민을 대상으로 한 행사가 열리고 우리는 계단에 관객으로 앉을 때가 있었다. 행사가 열리면 시장, 부시장님도 오셨다. 그때 우리 학생들 곁에 일반 시민들도 자리를 같이했다. 내 곁에 있는 어른에게 가끔 물었다.
“오늘 여기 부시장도 오시나요?”
그러면 반드시 그 어른들은 눈을 크게 뜨며
“아빠가 부시장이니?”
아니라는 말을 끝내 못했다. 부시장이 오면 부시장 운전사는 당연히 오니까 물었던 질문인데 어른들은 매번 아빠가 부시장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빛을 피하며 대답을 못 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왜 그걸 그 어린 나이에 알았을까? 운전수라는 직업이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무시의 대상이란걸.
아침에 비가 오지 않고 오후에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내게 시청으로 우산을 갖다주는 심부름을 시켰다. 온몸이 젖고 운동화도 젖은 상태로 시청에 도달하면 시청 본관이 아닌 별채 대기실이라고 불리는 초라한 작은 집 건물로 갔다. 그곳에는 시청에서 차를 운전하는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고도리나 포커를 치고 계셨다. 대기하는 동안 그 방에서 사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란 게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우산을 건네고 돌아서 나올 때 우뚝 선 높은 빌딩을 바라보며 우리 아버지도 저 본관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공식적으로 말하는 아버지의 직업은 공무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임시 기능직 공무원이 정확한 명칭이었다. 어린 시절 언젠가 아버지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출근도 하지 않고 며칠을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누워서 베개를 끌어안고 책을 읽고 계셨는데 아버지가 책을 대하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떨어졌다. 실망도 잠시 아버지는 그냥저냥 그 운전사 생활을 계속했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고 근무한 지 몇 년 이상이 된 임시직 공무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어 아버지가 자랑을 시작하셨다. 시청에 계신 친구분과 다투었는데 결국은 내가 이겼다고. 말끝마다 그 바보 놈이란 단어를 붙이며 두 사람의 시비 붙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내가 시청의 셔틀버스를 아는데 친구 놈이 유치원에서 운영하는 차를 자꾸 스쿨버스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스쿨버스가 아니라 셔틀버스라고 정정을 해 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소리를 높이며 그건 셔틀버스가 아니라 스쿨버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친구보다 더 소리를 높여서 말했다고 한다.
“시청에 있는 버스를 셔틀버스라 부른다. 그래서 유치원 버스도 스쿨버스가 아니가 셔틀버스다. 이 바보야”
냅다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아빠 누가 이겼어?”
“내가 이겼지”
“어떻게 알아?”
“그 친구가 아무 말을 안 하고 집으로 가버렸으니까”
난 크게 웃어버렸다. 아무 말 안 했다. 스쿨의 뜻, 셔틀의 뜻이 필요치 않았다. 싸움에 이겨 신이 난 아버지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무식한 우리 아빠가 창피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개와 기백이 너무 좋았다. 한 편의 멋진 코미디를 본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청량감이 내 속에서 올라왔다. 아빠는 중학교를 가 본 적이 없고 영어를 배운 적이 없다. 그냥 들어 알고 있는 영어 단어 정의가 내려지면 그게 끝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감이 늘 충천했다. 그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다고 엄마는 늘 말했다. 시골 대부분의 싸움이 그러했듯 목소리 큰 사람, 무식한 사람이 이기는 싸움을 여전히 승리로 장식하며 아버지는 평생을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무식한 고집을 내가 닮았다. 나는 안다.
대학에 추가 합격으로 겨우 합격한 날 우리 집은 잔치집 같았다. 엄마 아빠는 장녀가 4년제 국립대학에 간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다. 추가 합격이라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면 돼었지 꼴찌로 입학한 게 뭐 그리 대수냐고 그 무렵 아빠는 임시작이 아닌 정규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셨다. 그 때 필요한 서류가 최종학력 졸업장이었다. 엄마는 내게 아빠가 졸업한 학교에 가서 졸업장을 받아 오라고 하셨다.
무심코 교무실에 들어가
“졸업장 떼러 왔습니다.”
말하고 고무실 안쪽에 서 있는데 분명 내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리로 말했다. “요즘 세상에 초등학교 졸업장을 떼러 오는 사람도 있네.”
“그러게, 신기하네”
그 말들에 왜 수치감이 그렇게 치밀어 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그 때 나는 졸업장이란게 최종학력을 상징하는 거라는 것도 몰핬는데. 사람의 말에 생략되는 부분으로 인해 사람이 수치를 느낄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한 날이었다. 추가 합격한 대학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앞으로 훌륭한 사람되어서 니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줄거다 내적 맹세를 졸업장을 들어 걸어오는 운동장에서 했다.
그 뒤로 공부는 내게 강박이 되고 세상에 뭔가를 보여줘야 증명서 같은 것이 되었다. 무거운 짐 같았다. 실안 국민학교 제 6회 졸업 기념 단기 4286. 3 이라 적혀진 사진 서기로 계산해보니 1954년이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였다. 저 사진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버지는 앞에 있는 햇살이 눈이 부신 듯 눈을 찡그렸다.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우리 4형제는 해를 보고 사진 찍는 게 너무도 힘들었는데 그것도 유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