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력 백수의 좌절 (3-3)

세상과 만나는 법을 몰랐다.

by 소명작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하던 신앙 단체 간사 일도 중간에 그만두었다. 내 앞날이 더 소중했다.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앙은 언제나 내 미래를 위해 팽개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집 앞 독서실에 다녔다.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었다. 새벽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와 밥을 먹고 독서실로 향했다.


석 달간 공부를 하고 임용시험을 쳤다. 당연히 떨어졌다.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즈음 삼성에서 인력 구인 광고가 났다. 교육 대학원 이력이 있으면 혹시나 선발되지 않을까 싶어서 원서를 썼다. 난 순진한 시골 사랑 미었다. 삼성이 구하는 인재가 어떤 사람이란 걸 몰랐다. 그래도 국내 대기업에 원서는 내 봤으니 후회는 없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난 사실 직장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다. 교회에서 성가대로 주일 학교 교사로 섬겼지만 내게 무얼 하냐고 대놓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교회 1년 선배 언니가 전화를 했다.


시내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 선생님을 구하는데 잠시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난 내 전공의 일을 하고 싶었다. 피아노도 체르니 100번을 겨우 뗀 실력으로 무슨 피아노 학원 강사를 한단 말인지 언니는 여러 번 나에게 부탁을 했었다. 한 번 해 보라고 권유했다. 싫었다. 안 한다고 했다.


가끔 구인란을 보며 학원강사 자리가 나는지 보았는데 내가 일할 만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몇 달이 흘렀다. 그러다 미용실을 하시는 작은 엄마가 미미용실 카운터에서 일을 좀 봐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경리 일을 부탁하셨다. 어릴 때 방학이면 미용실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내곤 했었다. 파마 머리 하는 언니들에게 종이를 건네주고 바닥의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쓰는 일들을 가끔 도왔기에 집에서 노는 것보다는 그 일을 돕기로 했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곳에서 내가 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했다. 그런데 큰 미용실을 경영하는 작은 엄마 눈에 나는 너무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 같았나 보다. 가끔 금고의 돈으로 시장에 가서 간식을 사 와서 언니들에게 주던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사실 그건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앞으로 그런 태도로 무슨 일을 해내겠냐고 안 봐도 니 앞날은 뻔하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다.


난 그 작은 엄마가 막내 삼촌과 결혼하겠다고 우리 집에 인사 오던 광경을 기억한다. 유난히 흰 살결을 가진 고운 분이셨다. 어린 내 눈에 두 사람은 참 보기 좋았다. 그때 내 머리는 엄마가 만물장수 아저씨한테 산 면도날을 끼운 캇트 빗으로 머리를 잘랐다.


보자기를 두르고 머리를 자른 날은 하루 종일 엉엉 울었다. 안 그래도 넓은 이마를 가졌는데 그 이마에 눈썹까지 오는 앞머리가 아니라 이마 2/3가 드러나게 앞머리를 깎아놓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학교에 가면 놀림받을 게 뻔한데 엄마는 짧은 앞머리와 바가지 스타일로 머리를 잘랐다. 난 머리 자르는 날이 제일 싫었다.


그런 나에게 미용실을 경영하시는 작은 엄마가 생겼으니 내 인생이 무지개가 뜬 기분이었다. 나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행복했다. 작은 엄마는 늘 내게 학기가 시작되면 새 옷을 사주셨다.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졸업마다 과한 선물을 해 주셨다. 대학입학 때에는 멋진 정장을 고급 브랜드 집에서 사주셨다. 졸업 때도 용돈과 함께 좋은 옷을 사주셨다.


고향에 살던 삼촌네가 홍수로 집이 쓸려 내려가자 그 작은 엄마가 나서서 집을 짓자고 했다. 집안에 생긴 어려운 일에 언제나 제일 많은 부담을 하시면서 형제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면 모두가 나서서 돈을 내고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난 존경하는 사람으로 우리 작은 엄마를 꼽곤 했다.

그런 작은 엄마가 나를 나무라셨다. 인생 그리 살면 안 된다고. 충격은 받았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 좋은 작은 엄마를 실망시킨 것이 마음이 아팠다. 더 열심히 반듯하게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곳 미용실을 정말 그만둘 때가 되었다.


내가 일을 보던 카운터 자리를 엄마에게 내주고 난 그 자리를 나왔다. 정중하게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간다고 말씀드리고 나의 길을 찾아갔다.


고학력 백수 생활 쉽지 않았다. 대학원까지 졸업하면 뭐가 되나 보자 했던 사람들의 눈에 그저 난 모자란 인간이었다. 참 마음이 시린 1년의 삶이었다. 난 촌스러웠고 세상을 몰랐고, 세상에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몰랐다. 촌스런 시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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