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이기는 사람
고등학교 3학년 국토 남단의 끝 삼천포에서 나고 자란 그저 진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표를 갖지 못했다. 왜냐면 다른 곳에 가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우리 동네에서 국립 종합 대학에 통학할 수 있는 대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그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셨다. 나도 그랬다. 지원 원서를 냈다. 문과였던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인문학부에서는 국어국문학과가 최고의 적성학과였다. 소설가가 꿈이었으니까. 합격자 발표는 전화로 확인이 가능했다. 전화를 하니 번호가 없다는 응답이었다. 다시 전화했다. 동일한 응답이었다. 엄마도 몇 번을 확인했노라 말했다.
다시 건다고 합격 명단에 없는 번호가 합격으로 바뀔 리가 없지만 그래도 혹여나 했지만 역시나 없었다. 세상이 나를 패대기친 느낌이었다. 더 갈 데가 없는 낭떠러지에 나를 밀어버린 느낌이었다. 출구가 없는 벽에 갇힌 느낌이었다. 내리 잠을 잤다. 시계를 품고눈을 뜨면 시계를 확인했고 다시 눈을 감았다. 3일을 내리 잠을 잤다. 자는 거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대학에 떨어진 건 나인데 낙망한 거 나인데 나보다 더 절망에 빠지건 부모님이셨다. 그 실망을 나에게 한탄하듯 내뱉으셨다. 이중의 상처였다. 세상도 나를 버린 것 같았고 부모도 이런 나를 창피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을 준비한 건 엄마였다. 후기 대학에 원서를 넣자 하시면서 부산 큰집으로 보내려 하셨다. 시외버스를 타기 전 친구 언니를 만났는데 그 언니가 후기 대학에 가느니 그냥 전문대 가서 공부해라 교회 유치원이 있으니 취직 걱정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난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그 상황을 말했다. 엄마도 동의하시면서 1년이라도 공부를 더 하게 차라리 3년제 간호대학을 가자는 제안을 하셨다. 나 대신 그곳에 가서 원서도 사 왔다.
그런데 뜻밖의 연락이 왔다. 1차 원서를 넣은 대학에서 후기 대학 원서를 썼냐는 연락이 왔다. 그 당시 내가 후기 대학에 원서를 넣은 상태면 2중 지원이 되어 등록 결손으로 생긴 추가 합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을 담은 전화를 받은 듯하다. 그 당시에는 전기 후기 대학을 통틀어 한 곳에만 원서를 넣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때 친구 언니의 조언을 들은 나는 전문대로 방향을 바꾼 상태라 이중 지원을 하지 않아서 추가 합격 대상자의 기준에 부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결과 통보까지 며칠을 기다리라는 말에 바로 시외버스를 타고 대학교 교무처를 물어물어 찾아가셨다.
“우리 딸이 합격할 수 있냐: 어떤 절차가 더 남았냐?” 고 물었다. 그분들은 부모님 표정에서 간절함을 보시고 교칙을 따지지 않고 나의 원서와 성적을 열람한 후 말씀하셨다. “이 학생은 합격입니다. 추후 결과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안정권 안에 있습니다. ”
엄마 아빠는 정말 기뻐하셨다. 학교 교무처를 찾아가 이 이야기를 들었노라 동네방네 일가친척들에게 알리셨다. 우리 딸이 4년제 국립 종합 대학에 입학한다고. 효도였다. 4형제를 모두 4년제 대학에 보내고 싶은 꿈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부
부모님의 못 배운 한을 푸는 첫 번째 단추를 꿰었다. 그 후 매일 같이 자던 무조건의 잠을 끊었다. 내게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도 4년제 대학에 입학이 가능하구나. 나도 기뻤다.
대학에 입학을 하고 받은 첫 학번. 다소 당황스러웠다. 8841-52
88학년도 41 국어국문학과 52번 52가 문제였다. 추가 합격생 꼬리표가 학번에 달려 있었다. 이름을 호명할 때 ㅂ에서 내 이름을 지나쳐 갈 때 순간 내가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닌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ㅎ 성의 호명이 끝나고 연이어 ㅂ 성이 연달아 4명이 나왔다. 추가 합격생 다섯 명 중 4명이 ㅂ의 성을 갖고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는 열등감의 꼬리표를 달았다. 가끔 동기생들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네 박가들은 왜 뒤에 그렇게 몰려있니?”
“공부를 못해서 추가합격한 거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내 속에 열등감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 아직도 내 인생은 왜 이리 초라할까 생각했다.
그 넓은 대학 교정에서 나에게 어떻게 공부하고 지내야 하는 걸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갔고 식당에 밥을 먹고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통학 거리가 1시간 정도라 학교 가는 것도 집에 오는 것도 큰 숙제 같았다.
더군다나 엄마를 닮아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내가 통학을 하는 건 너무 큰 난제였다. 매일 버스에서 내리면 한 족 구석에서 웩웩 댔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5킬로그램이 빠졌다. 그 당시 신앙심이 깊었던 나는 학과 일에는 절대적으로 무심했다.
그 당시 신입생 환영회는 나이트클럽에서 했었고, 1박 엠티는 막걸리 소주가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마시는 문화가 있었다. 내가 열심히 했던 활동은 오로지 신앙인들끼리 모인 서클 활동이었다. 같은 교단의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실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곳에서는 선배들이 있었고 같은 학번의 다른 과 동기생들도 있었다. 그 모임도 이내 시들해졌다.
방향도 정체성도 없는 모임에 선배들은 죄다 군복 잠바에 어수룩한 아저씨 같았다. 몇 번을 나가다 말았다. 그러다 여름 방학에 덕유산에서 전국의 ㄴㄹㅌ 대학생들이 모이는 캠프가 열린다고 했다. 같은 교회 동기생들과 덕유산에 갔다. 텐트를 치고 밥을 해 먹었다. 너무 추웠다.
덕유산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얇은 여름옷만 가지고 참석한 나는 3박 4일 동안 한 잠도 못 잤다. 춥고 집이 아닌 노지에서의 잠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름 수련회 후에 뭔지 모르지만 2학기에 신앙 서클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다.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학기부터는 성적도 올라 처음으로 장학금도 받았다. 아빠가 너무 기뻐하셨고 여름 아르바이트 때문에 갈등을 겪은 내게 화해의 선물로 다 자란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해 새벽마다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 연습을 못했다.
경직된 나와 아빠의 관계 개선을 위해 엄마가 제안한 선물이었다. 내 방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환하게 웃었지만 아빠에게 고맙다는 말도 안 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우리 아빠를 내가 이겨먹고 있는 나쁜 딸이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무식과 큰 소리 자신감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눌리지 않는 아빠가 내 눈치를 보았다. 내 무식과 고집 승패 의식이 아빠를 넘어섰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세상에서 아빠를 이기는 사람은 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