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
내 남은 인생에서, 오늘만큼 젊은 날은 없다
살아오면서, 청춘이 아닌 날이 있던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근래 들어 세대를 가르는 대표적인 용어가 ‘라떼’다.
‘내 나이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의 말머리를 비꼰 말이다.
그래서인지 라떼 화법을 자주 쓰는 상사나 연장자는 퇴물로 찍히기 싫어 입조심을 한다.
현실 문제를 무작정 과거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근거로 일반화하려는 관성을 타파하는데, 라떼 비꼼이 일정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떼도 부작용이 있다. 라테를 안 쓰는 세대 편에 서려고 우르르 휩쓸린다는 점이다. 노인, 보수, 꼰대, 라떼 같은 말의 저변에는 늙음에 대한 멸시가 깔려있다. 재빨리 젊은 세대 용어에 투항하는 것도 처세술의 한 방편이겠지만, 난 심히 불쾌함을 숨길 수 없다.
나이와 청춘은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해본다.
왕년에 젊음의 절정기가 없던 사람이 있나?
그 절정기 이후로 하루하루 노화한다. 그래서 오늘은 항상 내일보다 젊다. 내 남은 인생에서, 오늘만큼 젊은 날은 없다.
인생은 자기 인생길 뚜벅뚜벅 가는 거 아니가? 내 얼굴의 주름과 남의 주름 개수를 비교해 셀 필요가 있나?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은 ‘이 순간’에 늘 가장 청춘에 살고 있다. 생명에게 청춘이 아닌 날이 있던가?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는 건 한창 청춘인 노년을 모욕하는 철없는 짓아닌가.
박범신 원작인 영화 <은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
젊다고 어깨에 힘주는 게, 돈 많다고 서민을 멸시하는 바와 뭐가 다른가?
자기가 노력해서 쌓은 것도 아니면서, 자기 나이와 비교하여 우월감을 누리려는 수법이, 과거를 끌어다 나이를 자랑하려는 라떼 꼰대와 뭐가 다른가?
인생은 삶이란 경험의 교집합이다. 무던한 풍파에 깎이고 깎여 그러한 모양을 갖춘 것이다. ‘신상(新商)’이 최고란 생각은 인간을 기계로 찍은 물건으로 취급하는 물신에 빙의된 행태가 아닌가.
나이가 들면 생각이 느려지고, 말이 어눌해지고, 눈이 흐려지고, 발걸음이 느려지고, 깜박깜박 잊고, 얼굴에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고, 머리가 백발이 되다. 그런데 체력장 능력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척도란 말인가?
성차별, 장애인 차별, 인종차별, 빈부차별은 멸시하면서 세대차별은 왜 젊음의 훈장처럼 생각하나?
인생은 누구나 이 순간이 청춘이다.
나이(세대)가 곧 합리성이나 진보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젊다고 오만하고, 늙었다고 의기소침해할 필요 없다.
패기는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험에서 우러난 패기는 노망이 아니다.
나이 든 사람도 정신 차려야 한다.
나이 먹은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
청춘 찾는다고 젊은이들 따라 치장하려고 애쓰고, 진시황처럼 자양강장제 찾아다니는 추태는 자신의 청춘에 대한 모욕이다.
행복의 파랑새처럼 청춘도 멀리 있지 않다. 육신은 노쇠해지지만 정신과 마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다. 이미 청춘이다. 육신에 공을 들이는 만큼 정신과 마음에 번성한 무성한 잡초를 쳐내고 꿈을 향해 도전하고 가꿔야 꼰대라는 손가락질을 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