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엄마 인간이 좋아? 아빠 인간이 좋아?"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살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밥 주는 인간이 제일 좋아!."
이 단순한 대답 속에는, 삶의 기본적인 필요와 인간관계의 미묘함이 교차하는 순간이 담겨 있다.
엄마 인간은 가끔 아빠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구름이는 왜 아빠만 좋아하는 걸까? 아빠가 집에 있으면 아빠 옆에만 붙어있고, 아빠가 외출하면 그제야 나에게 오잖아."
엄마 인간의 작은 서운함과 질투가 깃들어 있다. 인간들은 언제나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는 문득 언제부터 아빠 인간을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는지 떠올려본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는 엄마 인간의 어깨에만 붙어있었다. 앵무새 카페에서 나를 처음 발견한 것도 엄마 인간이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연결된 사이였다. 첫 며칠 동안 나는 엄마 인간의 어깨에만 앉아 있었고, 엄마 인간은 나에게 밥도 주고, 물도 주고, 부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나는 엄마 인간이 나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날, 엄마 인간이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아빠 인간이 나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 인간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엄마 인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면서, 나는 아빠 인간을 나의 새로운 보호자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로렌츠라는 학자가 발견한 '각인' 현상과 유사하다. 로렌츠는 어린 기러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본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니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는 이 현상을 ‘각인’이라고 불렀다. 각인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본능이 아니라, 생존에 대한 강렬한 집착의 표현이다. 인공 부화된 기러기들은 자신을 낳아준 어미 대신, 처음 본 로렌츠를 어미로 인식하고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곧 생존의 방법이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내 이마의 깃털은 아직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깃털이 하얗게 변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다. 아빠 인간이 나의 ‘엄마 새’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의 각인은 아빠 인간에게로 향했고, 이제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나의 두 번째 본능이 되었다.
특히 아빠 인간의 런닝 셔츠 속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때때로 나는 옷 속에서 쉬다가 호기심에 겨드랑이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 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모든 이가 나를 환호했다. 나는 그 순간들이 기분 좋았다. 아빠 인간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 역시 아빠 인간을 사랑했다.
이제 나는 아빠 인간이 없으면 약간의 불안감을 느낀다. 이게 분리불안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인간들을 너무 좋아하게 된 걸까?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이 집의 작은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