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노란 동그라미

by 사이

아침 회진 전에 감염내과에서 전화가 왔다.

“어제 보낸 배양 검사 나왔어요. MRSA 양성이에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메모지 한 귀퉁이에 날짜와 약 이름을 적었다. 반코마이신, 하루 두 번, 최소 2주.

병실 문 앞에 노란 경고판이 하나 더 붙었다.

'주의. 격리.'


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회용 가운을 덧 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 끈을 귀에 걸었다. 가운이 한 번씩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기 전, 글러브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 안에, 그녀가 누워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여러 번 수술을 받은 뒤였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만 들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왜 같은 건 누구도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보는 건 부러진 대퇴골과 골반, 금속핀으로 고정된 척추,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명랑한 쪽에 가까웠다.


“선생님, 저 여기 VIP예요. 선생님보다 여기 병동에 더 오래 있었어요.”

그녀는 회진이 끝날 때마다 내게 괜히 농담을 걸고, 틈만 나면 간호사들과 수다를 떨었다. 이동침대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들기도 했다. 차트를 들고 서 있으면, 내가 적는 걸 힐끔힐끔 쳐다봤다.

선생님 글씨 예쁘네요. 제 이름은 좀 크게 써주세요. 어차피 오래 남아 있을 거니까.”

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해서, 그냥 “네” 하고만 말했다.


MRSA가 나온 건, 수술 부위 상처에서 분비물이 조금 더 탁하게 보였던 후였다. 상처를 다시 드레싱 하면서, 나는 장갑 낀 손으로 거즈를 조심스레 들춰보았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선생님, 표정이 안 좋다?”

“균이 하나 나와서요. 약을 좀 더 센 걸 써야 할 것 같아요.”

“센 거? 저 이미 웬만한 건 다 맞아봤는데.”

나는 투약 프로토콜을 다시 떠올렸다.

매일 두 번, 두 시간씩. 주입 속도는 천천히. 부작용에는 발진, 오한, 열감, 구역.

“조금 힘들 수 있어요. 그래도, 이 균에 제일 잘 듣는 약이라서요.”

“균이 이기냐, 제가 이기냐 싸움이네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같이 웃지 못했다.


첫 번째 투약은 그날 오후에 시작됐다.

수액병 끝에서 약물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아무 변화도 없었다. 나는 침대 옆 모니터 숫자를 한 번, 그녀의 정맥을 한 번, 차트를 한 번씩 번갈아 봤다.

약이 얼마간 들어갔을 때, 그녀가 말했다.

“팔이 좀 뜨거워요.”

얼굴도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수액 속도를 줄이며 물었다.

“많이 불편하세요?”

“아… 롤러코스터 타는 느낌? 올라가는 구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나는 얼음팩을 가져오라고 부탁하고, 침대 머리를 조금 올렸다. 그녀는 숨을 깊게 쉬었다 내쉬며 중간중간 농담을 섞었다.

“이 약 맞고 멀쩡해지면, 광고해도 되겠어요. 이거 맞고 살아났다, 뭐 그런 거…”

웃지 않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내 오른손은 수액줄을, 왼손은 차트를 쥐고 있었다. 말로 해줄 수 있는 건 “조금만 더요” 뿐이었다.


몇 번을 더 맞고 나니, 그녀는 그 약의 리듬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주입 시작하고 십 분 뒤면 얼굴이 약간 뜨거워지고, 좀 추운 느낌이 들다가, 끝날 무렵엔 몸이 녹초가 된다고 했다.


“선생님, 이거 몇 번이나 더 남았어요?”

어느 날 그녀가 물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이미 사흘째였고, 계획한 건 열네 번 정도였다.

“열 번 정도요.”

“와, 열 번. 숫자가 너무 크다.”

그녀는 천장을 보다가 벽 쪽을 봤다.

침대 옆 벽에는 A4 용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간호사가 붙여 둔 식사시간표, 재활 일정, 약 이름 같은 것들 사이에, 작은 달력이 걸려 있었다. 구석에는 누가 붙였는지 모를 동그란 스티커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노란색이었다.

“저거 예쁘다.”

그녀가 말했다.

“어느 거요?”

“저 노란 거. 간호사 선생님이 리마인드용으로 붙여놓은 건데…”

그녀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약 맞을 때마다, 저거 하나씩 더 붙이면 안 돼요?”

“스티커요?”

“네. 모르겠어요. 그냥… 숫자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열네 개 채우면 탈출하는 게임처럼.”

나는 잠깐 웃음이 났다.

이게 무슨 치료 계획이냐 싶기도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벌써 계산이 끝나고 있었다. 7일간 하루 두 번씩, 칸은 열네 칸, 스티커 열네 개.

“한 번 해볼까요.”

그날 오후, 나는 원내 편의점에서 동그란 스티커가 들어 있는 작은 봉투를 샀다. 초록, 파랑, 빨강, 노랑이 섞여 있었다.


다음 투약이 끝난 뒤, 나는 그녀의 침대 옆 벽으로 갔다.

달력 아래쪽 빈 공간에, 작은 표를 그렸다.

1부터 14까지.

“오늘이 다섯 번째죠?”

“네, 그럼 다섯 개죠.”

나는 초록색 하나, 파란색 하나, 빨간색 하나를 차례로 붙였다.

그녀는 상체를 약간 일으켜 세우고 그걸 바라봤다.

“오, 진짜 게임 같네. 선생님, 마지막 14번째는 금색으로 해주세요.”

“금색은 없는데요.”

“그럼… 노란색이 금색인 척하죠.”

그녀가 웃었다.

나는 펜으로 14 옆에 작게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두었다. 거기에는 노란 스티커를 붙이기로 했다.

그 뒤로, 약을 맞는 일이 조금은 덜 막막해졌다.


그러나 투약이 시작되면, 그녀는 여전히 힘들어했다.

“선생님, 오늘도 컨디션 안 좋아요.”

“그래도 오늘 거 맞으면, 여섯 개째예요.”

“여섯 개…”

그녀는 벽을 슬쩍 봤다.


여덟 번째 스티커를 붙이는 날, 그녀가 말했다.

“만약 제가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이 약 그만 맞겠다고 하면요.”

나는 스티커를 잡은 손을 멈췄다.

“그만 맞게 해달라고 하면요.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 거예요?”

그 질문에,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약이 중간에 끊기면 균이 다시 자랄 수 있다는 것,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힘들어도 끝까지 맞아야 한다는 것.

“그만 맞게 해달라고 하시면... 그래도,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할 것 같아요."

나는 숨을 한번 쉰 후 말을 이었다.

"길어지면, 더 힘들어지니까요.”

그녀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은 평온했다.

“그렇겠죠. 제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기도 하고.”

“싸움이요?”

“예전에 저, 되게 멋있게 끝내려고 했거든요. 딱 한 번에.

근데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 거 보면… 지금의 제가 더 질긴가 봐요.”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웃어야 할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그냥 다른 얘기를 꺼내야 할지.

결국 나는, 스티커를 하나 더 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날짜가 늘어갈수록, 벽은 조금씩 화려해졌다.

중간에 한 번, 주입 중에 혈압이 살짝 떨어져 알람이 울렸다. 나는 손이 먼저 움직여 롤러 클램프를 잠갔다. 약이 멈추자, 그녀가 얕게 숨을 내쉬었다.

“... 이번 건, 여기서 끝내면 안 돼요?”

“그럼 스티커 반 개만 붙일까요?”

“아, 그건 싫어요. 어차피 할 거면, 그냥 다 할게요.”

"그럼 조금 쉬었다가 다시 갈게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는 투약 속도를 조금 더 줄이고, 옆에서 시간을 재었다.


열두 번째 스티커를 붙이던 날, 그녀가 물었다.

“선생님, 스티커 다 붙이고 나면, 이거 떼요?”

“글쎄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제가 가져가도 돼요?”

“그럼요. 환자분 건데요.”

“병실 벽이 허전해질 텐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벽을 한 번 짚었다.


열네 번째 날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그날 아침, 나는 스티커 봉투를 열어 노란 동그라미 스티커를 하나 골라 주머니에 넣었다. 회진에서 교수님은 간단히 말했다.

“반코마이신은 오늘까지 하고, 상황 봐서 경구제로 바꿉시다. 상태는 많이 좋아졌네요.”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투약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끝이에요?”

“오늘 게 마지막이에요. 잘 버티셨어요.”

“그럼, 이 약이랑 싸움은 이긴 거예요?”

“균이랑 싸운 거죠.”

“뭐, 둘 다 비슷하죠.”

그녀는 웃었다.

나는 침대 옆 벽으로 가서, 14 옆에 노란 스티커를 붙였다.

표는 꽉 차 있었다. 초록, 파랑, 빨강, 그리고 마지막 노랑.

그녀는 상체를 조금 일으켜 그걸 오래 쳐다봤다.

“이거 절대 떼 버리지 마세요. 상장 같아서 괜히 버리기 아깝잖아요.”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른 환자 있어도, 이런 거 써먹어도 돼요. 그때는 좀 더 예쁜 스티커로.”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그녀는 재활병원으로 전원되었다.

휠체어가 나갈 때,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노란 격리 종이는 이미 문에서 떼어져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빈 병실을 한 번 더 들어갔다.

침대 시트를 정리하는 간호사를 피해, 벽 쪽으로 갔다.

달력은 떼어져 있었고, 그 자리에 네모난 흔적만 남아 있었다.

종이가 붙어 있던 부분이 주변보다 조금 더 밝아 보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한 번 짚었다가 떼었다.

접착제가 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손끝이 조금 끈적했다.

새로운 이름이 침대 머리맡에 붙고, 다른 약들이 처방될 무렵, 나는 다른 과로 이동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다른 병원, 다른 병동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MRSA 경고문은 여전히 노란색이었다.

문 앞에 서서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쓰면, 그때의 냄새와 온도가 잠깐씩 겹쳤다.

내 옆에 있던 인턴이 물었다.

“선생님, 이 환자 항생제 코스가 꽤 길던데요. 힘들어하실 것 같은데…”

나는 차트를 보다가, 병실 안쪽을 한 번 봤다.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흰 벽이 보였다.

“힘들 거예요.”

나는 말했다.

“그래도, 끝이 눈에 보이면 조금 낫더라고요.”

인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캘린더 하나 붙이죠. 투약 일정 표시하고, 끝날 때까지 스티커로 표시해요. 조금 유치해 보여도 괜찮아요.”

“환자분이 좀 예민한 캐릭터던데.. 싫어하시진 않겠죠?”

“싫어하신다고 하시면… 다른 방법 생각해 봐야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의외로 이런 거 좋아하시는 분들 많아요.”


인턴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나는 다 적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양손의 글러브를 다시 한번 잡아당겼다.

가운 소매가 바스락거렸다.

나는 문에 붙어 있는 이름을 한 번 읽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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