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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Mar 08. 2023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데미안> 각성의 발견


친구들은 말한다. <데미안>은 어렸을 때 훨씬 좋았다고. 그들이 말하는 어렸을 때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던 10대를 이른다. 보통 사춘기라고 부르는 그 시즌이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그 때의 우리와 만났기에 참 좋았을까.


나는 십대 때 이 책을 보지 않았다. 몇 안되는 내 친구들은 책을 좋아했고 데미안에 열광했다. 주변에서 좋아하기에 나도 당연히 본 줄 착각했다. 마흔 넘어 북클럽에서 볼 때서야 깨달았다. 이 책을 처음 본다는 것을. 책은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다. 시작부터 헤르만 헤세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그 잠재력에 대한 신뢰가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랬다. 이 작가는 청소년기의 마음 디테일을 어쩌면 이렇게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까하며. 그 유치하고, 지나치게 진지하며, 절박하게 소심한, 그러면서 엉뚱하게 대범한, 그 면면을 어쩜 이렇게 세세하게 꺼내놓을 수 있는지. 지나간 시간 속에 파묻혀 있는 내 기억을 뒤지며 보물찾기 하듯 책을 읽었더랬다. 아 맞아, 그 때 그랬지.




나의 십대와 <데미안>이 교차하는 지점.
부모님 세계에 금이 간 최초의 순간을 기억한다.

나의 사춘기는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알면서 시작됐다. 나는 부모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부모님은 철저하게 내 동심을 지켜주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초등 고학년까지 산타클로스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산타는 어떤 마법같은 힘이 있어서 전세계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닫힌 문도 통과해서 들어온다고.


눈이 큰 동네 친구가 어떻게 아직도 모를 수 있냐며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말해줬다. 산타클로스는 부모님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는 너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그 활짝 웃는 모습에 정말 놀랐다. 옆에 아빠도 있었나.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다. 확실한 것은 내가 받은 충격의 무게. 세상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부모님이 저렇게 뻔뻔하게 나에게 거짓말을 해왔다니! 부끄러움도 없이! 게다가 온 세상이 똘똘 뭉쳐 꼬맹이들한테 산타가 존재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수많은 영화와 이야기와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니!


부모님에 대한 배신감과 더불어 세상도 믿을 곳이 못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책 <데미안> 속 '나'는 상황이 좀 더 나빴다.

산타 같은 추상적 존재가 아닌 프란츠 크로머라는 동네 일진 형과 연루되면서 부모를 다시 보게 됐다. '나'는 그에게 잘 보이려고 사과도둑 행세를 했다가,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신을 걸고 맹세해버렸다. 크로머는 치기어린 어린이에 불과한 '나'를 간파했고 돈을 요구한다. 미쳐버리기 직전.


일생일대의 죄를 짓고 들어온 '나'에게 아버지는 젖은 구두를 나무랐다. '나 자신이 살인죄를 고백해야 되는 판에 조그만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심문받는 범죄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p.27)'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던,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

그 새로운 느낌에 곧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나는 곧바로 엎드려 아버지의 발에 키스라도 하여 사죄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사죄할 수 없는 법. 어린 아이도 그쯤은 어떤 현자 못지않게 느끼고 안다.

p.28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크로머는 '나'에게서 돈을 뜯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저금통을 헐거나 부모님의 돈을 훔쳐 갖다줬다. 처음 2마르크에서 시작된 공물은 점점 그 요구사항이 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부모님이 '나'를 언제나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져있었다.

지금 부모된 입장에서 보면, '괜찮아, 이런 것쯤 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지'싶다. 그러나 기억 속 십대의 나는 '이건 적어도 지금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 나의 실존에 중요한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어처구니 없게 웃기지만. 그 시기엔 정말 그렇다.

구원의 손길은 부모가 아닌 친구로부터 왔다.
주인공 싱클레어 보다 조금 나이많은 전학생 친구, 막스 데미안으로부터.



이 이상한 학생은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소년이란 인상을 주지 않았다. 어른처럼, 아니 그냥 어른이라기보다는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우리 유치한 소년들 사이를 오갔다. 인기 있지는 않았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질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들에게 맞서는 그의 자신감 있고 단호한 어조가 다른 학생들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중략)...

그는 나보다 우월하고 침착했다. 그의 본질은 너무나도 도전적일만큼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아이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어른의 표정을 띠었는데, 약간 슬픈 냉소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줄곧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호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반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p.38



데미안은 크로머가 싱클레어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던 것을 본 후 말을 걸어왔고, 이후 '나'는 어쩐 일인지 크로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림자 같은 크로머와의 악연이 데미안과의 인연을 이끌었다는 점을 보면, 인생지사 새옹지마란 말이 딱이다.


데미안을 통해 싱클레어는 흔들리고 새로워진다.


데미안은 신실한 집안의 아들인 싱클레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준다. 카인에 대해,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회개하지 않은 도둑에 대해, 신에 대해, 좀 다른 관점에서 썰을 푼다. 어찌보면 불경하고, 어찌보면 합리적인 이야기.


아벨보다 비호감인 카인이 사실은 더 뛰어난 사람일 수 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고 안좋게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을 얘기할 땐 죽음이 명백해진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친 사람은 의리 없는 사람이기에, 친구로 삼기에 적당치 않다거나. 세상의 절반을 나쁜 것, 옳지 않은 것으로 처박아두는 현재의 신은 역시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시선이 아닌 관점에서 성경 이야기를 마주한 것이다.



사춘기는 나를 둘러싼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시작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유년을 벗어나 세상의 다른 쪽에 대해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아기 새가 알에서 나오려면 안에서부터 크랙 금 선을 만들어야 한다.
부모는 둥지를 만들어 줄 순 있지만, 알을 깨줄 수는 없다.
도움은 부모 외의 존재로부터 와야만 하는 것일까.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알에서 나오지 못한 새는 죽는다.
알을 깨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자기 발견.

Self.


나 자신으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시작하는 시점.


그게 십대이고 사춘기가 아닐까. 단순히 성에 눈을 뜨는 것, 전두엽이 덜 발달한 상태에서 빠져드는 지랄병 상태, 몸은 이미 어른에 가까운데 마음이 뒤늦게 급발진 급성장하면서 불협화음이 일상화된 상태. 이런 수식어 가운데 저렇게 하나 더 적어두고 싶다. 익숙한 주변을 떠나 나에게로의 순례와 각성을 본격 시작하는 시즌.


책의 후반부에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 데미안은 그가 예전에 알던 데미안이라기보다 싱클레어 내면에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데미안 형상을 한 또 하나의 싱클레어, 싱클레어의 진짜 자기자신 true self. 뭐. 그냥 내 생각이다. 현실의 데미안이라면 책의 후반부가 별나라로 가버린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난다.


'나'는 그동안 내면에 침잠하여 자신을 마주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림, 음악, 불멍, 여행 등. 대학 진학 이후 드디어 자기 자신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데미안을 다시 만났고. 싱클레어의 무의식 속 이성인 그의 아니마, 에바부인을 마침내 만나 친구가 되었다.

자기인식에 도달하여 한 없는 기쁨을 만끽했지만, 현실은 전쟁터였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진짜를 외면하면 안좋은 일이 일어난다는게 칼 구스타프 융의 지론이었던 것 같다. 반대로 자신의 그림자까지 알아봐주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던가. 야튼.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는 장면 조차 에바부인 머리에서 쏟아진 별에 맞는 것으로 받아들인, 그의 내면으로의 순례길은. 마음 깊은 곳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 안으로 들어오면서 끝이 난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그는 이제 성장했고, 상처의 고통을 느낀다.


성장한게 분명한데. 어쩐지 쓸쓸하다.


나의 십대와 데미안이 교차할 뻔 한 지점.
내 십대 시절의 정신적 방황도 어쩐지 쓸쓸하게 평정되긴 했다.

싱클레어처럼 내면 순례길을 떠나 진짜 나를 만난 기억은 없다.
헤르만 헤세가 믿는 인간 내면의 영성, 가치, 귀함은 내 것이 아니었다.
냉소가 깃든 자포자기의 명언으로 내 마음은 현실에 안착했다.


20대의 어느 날 신뢰하던 인류학 교수님이 인용한 그 말은
'인생은 가득찬 우물에 듣기우는 한 방울의 물'이었다.
인생 어차피 별거 없단 말,
수없이 들었을지도 모를 말인데,
커다란 강의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마음이 편안해졌던 그 순간이 기억 난다.

이 명제에도 어느 날 칼자국이 그어질까.


40대가 되어 부모가 된 지금.
헤세처럼 인간 내면의 영성, 가치, 귀함을 믿어보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중략)...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 뿐이다. p.11



몇 안되는 나의 친구들이 말했던 '나이들어 보니 어쩐지 그렇게 빛나지 않더라'는 느낌은 어쩌면 살면서 정말 인간같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모가 그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다시 경험할 일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절이고 다시 반복될리 없는 시간이 십대의 사춘기니까.

나는 아이들을 통해 또 한 번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집 아이들이 혹시 나와 비슷한 10대를 보낼 경우에 대비해 이 책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둬야겠다. 친구들에게 옛날 이 책이 그랬던 것처럼,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는 깜깜한 밤바다에서 등대가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의 건강, 성장, 그리고 좋은 인연을
오늘도 기도한다.


Unsplash - Axel Antas-Bergk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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