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괴물의 관상
무한한 수고와 정성을 들여 빚어낸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사지는 비율에 맞춰 제작되었고, 생김생김 역시 아름다운 것으로 선택했다. 아름다움이라니! 하느님, 맙소사!
그 누런 살갗은 그 아래 비치는 근육과 혈관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발은 출렁거렸고 이빨은 진주처럼 희었지만, 이런 화려한 외모는 허여멀건 눈구멍과 별로 색깔 차이가 없는 희번덕거리는 두 눈, 쭈글쭈글한 얼굴 살갗, 그리고 일자로 다문 시커먼 입술과 대조되어 오히려 더 끔찍해 보일 뿐이었다.
p.71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문학동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이름이 아니다.
책에서 기괴한 피조물을 만든 창조자의 이름이다.
그 괴물은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키는 컸다. 빅터가 여러 사체에서 신체 부속을 조달하고 혈관을 연결하는 등의 작업이 너무 정교하고 까다로워 피조물을 좀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미터가 넘는 장신이 됐다.
얼굴이 극한 비호감이다. 눈이 허여 멀 건했고, 피부가 누렇고 쭈글쭈글했다. 피부가 헐크처럼 초록색까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입술색이 어두워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보는 사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를 마주한 사람은 하나같이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거나, 그에게 공격을 가했다.
역시 외모의 팔 할은 눈과 피부인 걸까. 새하얀 치아와 윤기 흐르는 찰랑찰랑 흑발이 무색해지는 혐오감과 공포감이 그의 얼굴에서 풍겼던 모양이다. 좀비 느낌.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와 맑은 눈, 명랑한 입에 대한 선망과 열렬한 호감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 17xx 년 유럽이나 내가 사는 20xx 년 아시아나 매한가지인 듯하다.
혐오감을 주는 얼굴 생김과 대조적으로
그의 심상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곱다.
곤경에 처한 이에게는 도움을 주고, 책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으며, 사물에 대해 관찰하고 사유할 줄 알았다. 달과 불, 추위, 눈, 봄에 대해 경험과 관찰로 깨우치는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며, 그 역시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다. 친밀한 인간관계와 연대를 갈망하는 그의 외로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기괴한 생물은 지적인 존재다.
그는 영어뿐 아니라 불어도 독학으로 터득했다. 우연히 손에 넣은 고전을 소중히 하고, 은신처 식구들을 관찰하며 말과 글을 읽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우울과 낙담을 배웠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보며 고결한 사고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실낙원>에 홀딱 빠져들었단다. 저 유명한 세 권의 책 가운데 내가 끝까지 제대로 본 책은? 한 권도 없다.
그는 매우 튼튼하고 힘이 셌다. 추위를 견디고 산을 넘는 데는 인간 이상이었다. 보통의 인간을 넘어서는 괴력 때문에 우연찮게 첫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피해자가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사랑받는 막내였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가 매우 건장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김새는 관상, 신상, 심상으로 나뉜단다.
관상을 논하는 <마의상법>이란 책에는 "잘난 관상은 몸이 튼튼한 신상만 못하고, 몸이 좋은 신상은 마음씨 좋은 심상만 못하다"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고운 마음이 첫째 좋고, 몸이 튼튼한 것이 둘째, 얼굴이 잘생긴 것이 셋째란다. 분명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외양보다는 마음이 제일이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진리로 통한다.
그런데. 실상은?
심상보단 관상이 우선인 것 같다.
그 피조물은 곱고 사유하는 심상, 건장한 신상을 갖췄건만, 관상은 죽은 이와 다를 바 없었다.
결말부터 얘기하자면 그 피조물의 생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지만 흉측한 얼굴 탓에 누구 하고도 가까울 수 없었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삶이 죽은 사람 관상과 닮긴 했다.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다.
내 피부도 쭈글쭈글 해질 테고,
나이 들면서 눈도 탁해질 텐데.
생김새가 인간관계와 삶을
결정짓는 세상에 나를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뭐. 인물이 좋으면 한 번 더 돌아보게 되고,
목소리가 좋으면 한번 더 들어보게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것도 인지상정일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책 속 피조물이
외모 때문에! 인간관계를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인다.
어째서 일상을 사는 우리에겐
심상보다 얼굴이 더 중요할까.
왜 외모가 어느 정도 충족된 후에야
상대의 마음과 지성을 알아볼 여유가 생기는 것일까.
그 피조물이 태어난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 옆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보인다.
그리고 빅터가 도망간다.
무한한 수고와 정성을 들여 빚어냈음에도 피조물이 눈을 뜨자 그 흉측함에 화들짝 놀라서 달아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집 아이들도 탄생 직후 아름답진 않았다.
뱃속에서 양수에 퉁퉁 불어 나오는 데다,
머리털이 하나도 없기도 하고,
눈을 뜨지 않은 경우도 많다.
겉모습만 보자면 그냥 작은 핏덩이 같다.
TV광고에 나오는 활짝 웃는 아기 모습은 생후 100일 정도 지나야 볼까 말까. 100일까지 환골탈태 수준의 보살핌을 얼마나 많이 겪어야 하는지, 겪어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무한한 수고와 정성'은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만들 때뿐 아니라 보통의 부모가 아기를 사람으로 키울 때에도 절실하다.
생후 100일뿐 아니다. 아이가 자라서 밥을 먹기 시작할 때, 걸음마를 시작할 때, 말을 시작할 때 등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엄마일 수도 있고 아빠일 수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 보육교사 일 수도 있다. 관심받고 사랑받는 시간이 뒷받침되어야 한 존재가 나아갈 준비가 될 텐데.
<프랑켄슈타인> 피조물은
태어난 이후 그런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 옆엔
아무도 없었다.
피조물이 세상에 나온 후 그의 부모 격인 빅터가 곁에 있어줬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괴물 같은 외모 때문에 인간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못할 때에도 그는 옆을 지켜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진짜 괴물은
생명을 창조하고 방관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아닐런지.
진짜 괴물은
정말 외모나 관상이랑 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메리 셸리가 말하는 괴물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