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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Mar 23. 2023

그것은 사과였다

<변신> 왜 하필 사과일까?


카프카 <변신>은 색깔로 치자면 대체로 칙칙하다.

대체로 갈색이거나 잿빛인 이야기 속에서 분명한 색감을 주는 것 중 하나가 사과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딱딱한 껍질을 한 벌레가 된 이후 아버지가 그를 향해 물건을 던진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식구들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공격했다. 식탁 위에 있던 사과를 주머니에 가득 채워갖고 와서.


그때 그 바로 곁에 무엇인가가 가볍게 던져져, 날아와 떨어지더니 그 앞으로 굴러왔다. 그것은 사과였다. 곧 두 번째 사과가 뒤이어 날아왔고, 그레고르는 놀라서 멈춰 섰다. 아버지가 사과로 자기에게 폭탄 세례를 퍼붓기로 결심했으므로 더 달려봐야 소용이 없었다.


카프카 <변신> 민음사 p.62



아버지가 던진 빨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혔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말려서 소동은 일단락되었으나 그레고르는 아팠다. 단 이 일로 가족들과 벌레 그레고르의 관계는 전환점을 맞았다. 가족들은 어떤 성찰을 하게 되었고, 언제나 닫아두었던 그의 방문은 조금 열렸다. 그는 비로소 가족들의 저녁식사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때 그가 본 저녁 정경에서 가스등의 노란 불빛이 연상됐다. 직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계속 입고 있는 제복의 푸른빛과 더불어 그에게 무차별적으로 던져진 빨간 사과. 책에 나오는 희미한 색깔은, 내 기억에 이것들이 전부다.


도대체. 왜.

항상 사과일까.

그레고르에게만 의미 있는 과일이 아니다.


사과로 인해 사람들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고향의 사과였다. 그의 과학은 인간 마음속의 세계를 뒤집는다. 파리스의 황금사과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 설마 전쟁의 시작이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친다는 사과일까 싶긴 하지만, 쓰레기통을 어디에 둘 것인가로 격심한 부부싸움이 일어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비유적으로 분명 소소한 자존심 문제가 도화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쟁으로 멸망한 트로이 후손이 훗날 로마를 세우고. 트로이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노래한 <오디세이아>는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



성경에는 그저 열매라고 기록되어 있다지만, <실낙원>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이브와 아담이 손 댄 금기의 선악과를 사과로 암시했다. <백설공주>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사과이며. <기억전달자>에서 조너스에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암시해 주고, 그로 하여금 규칙을 어기게 한 계기도 사과였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훔쳤다고 말한 것도 사과다. 그는 이 사과도둑행세를 계기로 아버지 세계에 금이 가는 것을 목격한다. 휴대전화 사용문화에 획기적인 한 획을 그은 회사의 로고가 한 입 베어문 사과라는 사실은 말해 무엇하리.



사과가 흔하다고는 하지만. 대체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딱딱하기로는 배도 딱딱하다. 빨갛기로는 딸기도 빨갛다. 새콤하기로는 오렌지나 귤, 달콤하기로는 애플망고나 잘 익은 홍시만 한 게 있을까. 흔한 걸로 치면 밀이나 쌀, 콩, 옥수수가 더 흔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과일까.

사과에는 어떤 과일보다 풍부한 의미와 상징이 들어있는 것 같다.


사과는 열매다. 곡식처럼 인류의 끼니를 책임지진 않지만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 해왔다.


라틴어로 사과는 Malus. 라틴어로 악을 뜻하는 Malum과 비슷하기에 사과에 선악과같은 이미지가 따라붙게 되었다고 한다. 오해일 뿐이라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둘을 연결시켜 발전했나 보다. 연상작용이 기억의 핵심이니까.


사과의 학명을 찾아봤다. 사과는 장미과Rosaceae 사과나무속Malus으로 분류된다. 장미와 유전적으로 연결됐다. 장미와 한 배를 탄 운명의 열매라고 하면 너무할까. 붉은 장미가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까칠한 허영을 나타내는데 흔히 쓰이는 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파리스의 황금사과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헌정되면서 트로이 전쟁이 불거졌던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과 속에 장미의 의미를 포함시키는 것은 과한 접근일까. 글쎄. 춘분에 부는 바람에 누군가는 '사과 꽃에 부는 바람'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사실 내 주변에선 춘분보다 더 늦은 시기에 사과 꽃이 피지만, 저 바람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한창 농사일로 바빠지기 시작하며 새 생명이 움트는 봄. 그 봄에 부는 바람. 사과 꽃에 부는 바람이란 이름이 사춘기를 떠올리게 한다. 봄은 보통 청춘을 상징하니까.


사과 특유의 청량감에 청춘의 싱그러운 냄새가 나는 듯하다.


사과에는, 장미에는, 봄에는 그런 공통적인 암시가 있는 듯하다. 새로운 에너지와 그로 인한 강력한 한 방의 실수. 아삭하는 소리만큼 감출 수 없는 실수. 옆에 있는 다른 과일도 익어버리게 만드는 막강한 영향력의 실수. 막상 저질러진 직후엔 후회스럽지만 훗날 보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는. 그런 실수 말이다.


단 너무 익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레고르 등에 박힌 사과는 거기서 서서히 썩어갔다. 그레고르가 자신이 완전히 쓸모없음을 인지하고 숨을 멈추던 순간, 그 사과 썩은 자리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주변에 흔해서든, 예뻐서든, 자칫 악으로 빠질 수 있는 길이든. 내가 보지 않고 인식해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사과에서 시작된 생각을

이렇게 주절주절 풀어놓는 것이

부끄럽고 껄끄럽지만 멈출 수가 없다.

청춘이 아님에도 실수는 계속될 것 같다.


우리말 사과에 한 가지 의미가 더 있어 다행이다.

I’m Sorry! I couldn’t resist.



Unsplash - To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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