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아빠는 커서 뭐가 된거야
텀블러
어른들의 동화
by
박희종
Feb 5. 2020
한 여대생이 아끼는 텀블러가 있습니다
재작년에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텀블러였습니다
좋은 브랜드의 제품도 아니고 기능이 정말 좋은 것도 아니지만 한창 대입을 준비하던 때에 받아서
고3 시절을 함께 보내서 그런지 유독 애착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오고 대학교 로고가 있는
텀블러도 받고 유명한 커피 전문점 텀블러도
선물 받았지만 아침에 가방에 항상 챙겨서 나오는 것은
이제는 조금 낡은 그 텀블러였습니다
별로 다름이 없던 어느 날 그 여대생은
따뜻한 커피를 한잔 담아 볕이 좋은 캠퍼스 밴치에서
앉아 있었습니다. 수업이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입학 때부터 짝사랑하던 과 선배가 말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뭐해?
친구들 기다려요~밥 같이 먹으려고
어? 그 밥 나랑 먹으면 안 돼? 나 밥 먹을 사람 없는데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아 진짜요? 좋아요 애들한테는 톡 하죠 뭐
머리가 하얗게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선배를 따라나서는데 그만 텀블러를 벤치에 두고 갔습니다
그 여학생은 짝사랑하던 선배와 밥도 먹고 맛있는 차도 마셨습니다 마치 데이트를 한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기숙사에서 친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여학생의 짝사랑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본인들이 더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날은 여학생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때서야 잃어버린 텀블러가 생각났습니다
나 텀블러 두고 왔다
어디에?
인문대 앞 벤치에
언제?
아까 선배랑 거기서 마주쳤는데 그때 정신이 없어서
에이 그럼 포기해 누가 가져갔거나 벌써 버렸을 거야
그럴까? 지금 가면 그래도 혹시
야 뭐 그렇게 소중한 거라고 너 그거 3년도 더 쓰지 않았어?
거진 그렇지
야 그럼 됐어 이제 포기해 다른 텀블러 있잖아 없으면 내가 하나 줄게 나 진짜 많아
아 나도 있어 있는데 그냥 뭔가 그건 아쉽거든
야 그냥 차라리 선배한테 핑계 대고 하나 사달라 해 그리고 너도 같은 걸로 선물하면 되잖아
야 진짜 천재적인 데 야 그렇게 해
ㅎㅎㅎㅎ 나 그래도 한번 갔다 올게 괜히 그래
그 여학생은 늦은 시간에 텀블러를 두고 온 벤치로 향했습니다 물론 아직 텀블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벤치에 가보니 그 낡은 텀블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겁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학생은 천천히 뚜껑을 열어 담겨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셔봅니다 따뜻하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의 온기가 남아있었습니다
여학생은 말도 안 되지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뭔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큰 의미가 없는 작은 물건이지만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시간은 뭔지 모를 우정이 쌓인 듯합니다
오늘 보낸 짝사랑과의 설렘도 좋았지만 오래된 텀블러를 다시 찾은 것도 오늘을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아도 내 주변을 항상 묵묵히 지켜주는 존재는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그 소중함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아도 소중한을 느낄 수 있다면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keyword
공감에세이
텀블러
덤덤
4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박희종
직업
회사원
더 비하인드
저자
아직도 꿈을 버리지 못한 어설픈 어른. 그래서 꿈을 잊은 어른들에게 꿈을 찾아주고 싶어하는 철없는 성인 교육자.
팔로워
1,277
제안하기
팔로우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이 짧은 이유
외로운데 혼자 있고 싶어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