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인자에서 인도자로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위기에 처한 존재였습니다. 히브리 남자아이는 모두 나일강에 던져져야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갈대 상자에 그를 숨겼습니다. 그는 죽음의 물 위에서 살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애굽 왕궁의 공주의 아들로 길러집니다. 피는 히브리인이었고, 옷은 애굽의 것이었으며, 정체성은 분열된 채 자라난 청년.
그런 그가 어느 날, 애굽 사람이 히브리 동족을 치는 장면을 보고 분노합니다.
그가 좌우를 살피고 사람이 없음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 출애굽기 2장 12절
모세는 분명 정의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정의의 방식이 하나님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열심이었지만, 그 열심은 의분(義憤)의 이름을 한 자기 방식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모세는 광야로 도망쳐 미디안에서 40년간 ‘침묵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집트의 궁정에서 배운 말과 권력의 언어는 이제 사라지고, 광야의 언어, 침묵과 양 떼와 먼지가 모세의 일상이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출애굽기 3장 14, 10절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불러내십니다. 이제는 권력의 옷이 아니라 광야의 흙먼지를 입은 사람을 통해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신학적 해석: 소명은 무너진 자에게 찾아온다
칼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에서 소명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불가능한 자를 부르신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를 가능케 한다."
모세는 실패한 지도자였습니다. 살인자였고, 도망자였으며, 말이 느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설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만 말씀하십니다(출 3:12).
디트리히 본회퍼는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 위에 세우지 않으시고,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한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모세는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그가 강하던 시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해지고 침묵하던 광야에서, 하나님은 그를 불러 구원의 대장정으로 이끄십니다.
철학적 통찰: 진정한 자유는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20세기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존재의 용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가 누구인지 마주 보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초대받는 용기에서 나온다.”
모세는 자신의 실패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직면하고도, 하나님 앞에 선 그 순간—그의 진짜 정체성은 시작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모세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히브리서 11장 24–26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는 때때로 정의를 향한 열심 속에서 모세처럼 ‘좌우를 살피고’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정당하다고 믿는 길 너머에서, 광야에서, 침묵에서, 실패에서 다시 부르십니다. 소명은 성공한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잃은 자에게, 도망친 자에게, 그러나 하나님을 놓지 않은 자에게 옵니다. 모세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진짜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살인자가 아니었고,
광야의 도망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인도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