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고 마시며 원망하다
광야는 출애굽 이후의 필수적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가장 먼저 터져나온 것은 찬송도, 예배
아닌 원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출애굽기 16장 3절
백성은 이미 애굽에서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묶여 있었습니다.
몸은 자유인이었으나 영혼은 과거의 안정과 세속적 풍요를 그리워했습니다.
해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광야는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장이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셨고, 메추라기를 보내셨고, 반석에서 물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여전히 원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배고픔보다 더 깊은 결핍,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16절은 광야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라.
칼 바르트는 광야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워내심으로 채우신다.
인간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광야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자리다.”
— 『교회 교의학 IV/3』
광야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배우는 학교였습니다.
광야는 존재의 ‘경계선’
철학자(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은 광야를 ‘궁극적 관심과 세속적 관심이 충돌하는 경계선’이라 설명했습니다. 광야는 우리가 무엇을 ‘신뢰할지’, 무엇을 ‘생명이라 부를지’를 묻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묻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닌가? — 출애굽기 17장 7절
광야는 그 질문에 대한 인내의 수업이었고, 그 답은 기적보다 관계의 신뢰였습니다.
신약에서 다시 드러난 ‘광야의 신학’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광야로 나가 사십 일을 금식하셨습니다(마태복음 4장).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시험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그들은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고린도전서 10장 4절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적인 공급을 언급하며, 특히 "신령한 반석"을 통해 물을 주신 사건을 그리스도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만나와 물, 반석은 장차 오실 생명의 떡이요, 영원한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광야
오늘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경제적 부족, 관계의 갈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그러나 그 광야의 본질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결핍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우리의 허기를 채우려 할 때,
우리는 끝없이 배고플 것이다.
그러나 그분으로 채워지면, 부족은 은혜가 된다.”
광야는 은혜의 지연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만으로 충분함을 배우도록 길을 멀게 하시는 시간입니다.
결론 – 광야는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
광야는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추셨지만,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교육 과정이었습니다.
믿음은 만나를 받는 순간이 아니라, 만나가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고 잠드는 밤에 자랍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결핍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시며, 광야를 통해 천국의 식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