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집게손가락
“엄마, 빨리 병원 가요.”
집게손가락을 감싸 쥔 막내아들이 뒤뜰에서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결혼식장에 갈 때 입을 옷을 챙기느라 장롱을 뒤지던 나는 놀라 밖으로 뛰어나왔다. 막내아들 놈의 장갑 낀 손이 금방 피로 물들었다. 뻘겋게 젖는 것을 보니 손이 떨려 자동차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막내 녀석이 괜찮다며 천천히 하라고 한다. 읍내의 정형외과 의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날은 친정 조카의 결혼식 날인 12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지리에 서툰데다 주차까지 서툰 내가 생소한 도시 복판에 있는 결혼식장을 찾아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막내 녀석이 같이 가겠다고 집에 내려온 것이다. 친정에 부모님이 안 계시니 발길이 뜸해져서 자연히 외사촌 간에도 만날 일이 적어 서먹서먹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그러자고 했다. 두어 시간 후에 출발해도 늦지 않겠다며, 난로에 넣을 화목을 자르겠다고 녀석이 뒤뜰로 나간 뒤 채 반 시간도 안 되어 사고가 난 것이다.
신경과 근육이 조금 붙어 있을 뿐 손가락뼈 한마디가 거의 으깨졌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녀석의 손가락을 으깨고 지나간 것이 목공소에서 쓰는 업무용 절단기라는 말을 듣고 의사는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술이 잘 되어도 상처 부위에 세균이 감염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손가락을 절단해야 할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가장 많이 쓰는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쓰지 못하게 되면 어찌하나 싶어 안타까웠다. 그리고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손가락 없이 불편하게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과 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수술이 끝난 뒤 막내 녀석을 입원시키고 집에 돌아와 병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는데 문득 막내 녀석이 은행나무를 자르다가 그리되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창밖에 아들이 자르다 팽개쳐둔 나무토막과 낙엽이 다 진 은행나무가 말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문득 아들이 손을 다친 것은, 은행나무가 노한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오십 년쯤 되었을 것이다. 허리둘레는 한 아름이 너끈히 되고 키가 전신주 높이만큼이나 크게 자란 녀석이다. 그런데 두어 해 전 벼락이 치던 날 밤에 그 밑에 묶어놓았던 강아지가 죽은 일이 있다. 그 뒤 집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좋지 않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은행잎 채취하러 온 사람이 나무를 자르고 잎을 채취해간 것이다.
이듬해 늦은 봄에 베어낸 은행나무 그루터기에서 무수한 줄기를 벋어 올리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함성이라도 지를듯한 기세였다. 잎마다 독기를 품고 여름내 나를 노려보듯 파랗게 자랐다. 우듬지도, 밑둥도 잘린 채 누워있는 나무토막도 몸 안에 각인된 시각을 기억해내고 봄부터 여기저기 싹을 틔우고 줄기를 벋어 올렸다. 그러나 가을이 되기도 전에 잎을 떨어뜨리며 독기를 내려놓고 초라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물건을 챙기다 말고 밖으로 나왔다. 은행나무를 베기 전에는 쫓아갈 엄두도 못 내던 환삼덩쿨이며, 며느리밑씻개가 나뭇가지를 친친 감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다. 나는 병원에 가는 것보다 먼저 덩굴을 뜯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 말라버린 넝쿨 줄기와 잎에 붙은 가시가 매섭게 내 살갗 여기저기를 할퀴었다. 나는 나무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사과했다.
“은행나무야, 정말 미안하다.”
나무를 자르면서 미안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 생명이 거기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자를 수밖에 없는 사정을 미리 말했더라면 나무는 그리 노하지 않았을 게다. 잎이 무성한 여름이 아니고 동면에 든 뒤 잘랐더라도 그리 화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허리에 맨 빨랫줄의 매듭을 끌어안아 제 살 속에 묻어 두는 순하디순한 나무가 제 몸 대신 아들 녀석의 집게손가락을 톱날 밑에 밀어 넣었을 리는 없다.
막내 녀석의 집게손가락은 세균 감염 없이 잘 치료되었으나 으깨진 뼈를 제거한 때문에 조금 짧아졌고, 접합할 때 잘못되어 약간 틀어졌다. 감각이 살아있어 다행이지만 틀어지고 짧아진 아들 녀석의 집게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은행나무를 떠올리고 다시 사과한다.
막내 녀석이 톱질하려다 만 은행나무 나무토막은 두 해째인 올해도 싹을 틔우고 줄기를 삼십 센티미터나 키워놓고 다시 가을을 맞았다. 이젠 그만 노여움을 풀고 제발 내년에는 새싹을 틔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가을 은행나무가 동면에 든 뒤에 곧은 가지 한두 개만 남겨두고 무수히 돋아나 잔가지들은 정리해주어야겠다. 그래서 예전의 멋진 모습으로 자라게 도와야겠다. (2009. 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