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달팽이
정말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비다. 어제 낮부터 부슬부슬 내리더니, 오늘 새벽까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못 살겠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들이었는데, 해갈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일을 오늘 꼭 해야겠다. 그놈을 어떤 방법으로 밖에 내보낼까 궁리해본다. 풀밭을 향해 멀찍이 집어 던져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할까, 아니면 기어갈 수 있게 문밖에만 내놓아 줄까.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달팽이란 놈은 언제나처럼 목을 길게 늘이고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위를 향해 느릿느릿 기어 올라가고 있다. 종이 위에 놈을 올려놓았다. 녀석은 갑작스런 변화에 깜짝 놀란 모양이다. 얼른 제집 속에 몸을 집어넣고 공을 만들어 종이 위를 데구르 구른다.
나는 처마 끝 촉촉하게 젖은 타일 바닥 위에 종이 째 녀석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가 새벽 5시가 조금 못 된 시각이니 밖은 제법 어두웠다. 20여 분 뒤 밖으로 나와본다. 달팽이는 밖의 어둠과 습기에 자신감을 얻었나 보다. 머리를 조금 내놓고 더듬이를 좌우로 움직이며 주위를 살피고 있다. 나는 어린 자식이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하는 어미의 심정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나는 방에 들어와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늦은 나이에 임용 고시를 보고 남도의 끝 고흥에 발령받아 왔다. 그리고 비어있는 관사에 짐을 풀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욕실에서 조그만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집을 등에 짊어진 지름이 2Cm 조금 못 되는 작은 놈이다. 두어 달 동안 집이 비어있었다니 욕실에서 물을 사용한 일도 없었을 텐데 용케도 살아 있었다. 음습한 곳에서 만났다면 불결한 생각이 들었을 텐데, 햇볕이 잘 드는 욕실에서 본 녀석은 왠지 반가웠다.
내가 녀석을 만난 지 석 달쯤 된다. 놈은 여기저기 상태를 살피는지 부지런히 더듬이를 움직이며 욕실의 타일 바닥이나 벽을 타고 움직인다. 놈이 느린 움직임으로 밤새 어디만큼 갈 수 있을까 가늠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욕실에 수증기가 가득 차서 거울이 뿌옇게 되었을 때, 나는 거울에서 달팽이의 흔적을 발견했다. 녀석은 내가 쓰는 세면도구도 한 번씩 기어갔을 것이고, 양치 컵도 여러 차례 핥고 지나갔는지 모른다. 부드러운 제 살에 상처가 생길까 봐 투명하고 끈끈한 액을 바르고 슬며시 기어가는 놈이 미워진다.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도 놈을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한 마리 달팽이인지 모른다. 어렵고 힘든 일에는 칩거해 버리는 것도 달팽이란 놈과 흡사하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가면 먼저 대문을 걸어버린다. 혼자 살기 때문에 허전해서 그렇다지만, 누가 찾아오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다. 수박 겉핥기식의 대화는 소득 없이 나를 피로하게 만든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들여놓지 않았다. 모든 것에서 좀 자유스러워지고 싶었다. 굼뜨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놈에게서, 정신없이 살아온 내 삶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놈은 제집 속에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모양인데, 나는 숨어만 있다. 그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높은 벽을 탓하고 좌절했던 나를 돌아본다. 좀 쉬면서 생각해 보는 단순한 방법도 못 깨우치고 가슴 아파했던 일들이 후회된다.
영 안 되면 제 몸의 체액을 분비하며 옮기는 달팽이의 또 다른 일면이 내게는 없었다. 달팽이도 그렇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칩거해 버리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놈이 높직이 올라가서 꼼짝하지 않는다. 다음 그다음 날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그놈이 물기 없는 욕실에서 두어 달도 잘 버티었다는 것을 잊고, 말라죽을 것만 같아서, 일주일을 못 넘기고 그놈의 등에 물을 뿌려 주었다. 허나 그놈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달팽이란 놈이 달라붙어 있는 부근에 기어 다닌 흔적이 무수히 나 있는 것을 보고, 녀석이 밖으로 나가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놈의 눈에 방충망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창유리 따위는 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바람과 습기가 들어오는 창을 향하여 제 몸을 녹여가며 콘크리트 문턱을 수없이 맴돌았으리라.
이번에는 놈이 높은 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물을 퍼서 뿌려도 내 얼굴에 다 떨어지고 놈의 등에는 별로 닿지 않는다. 그런대로 일주일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녀석의 몸은 자꾸 오그라들어서 껍질 끝부분이 허옇게 드러났다. 낮은 데 있으면 또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어 물기가 많은 곳에 놓아주었을 것이다.
거의 한 달쯤 되었나 보다. 죽었을 녀석에게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그날은 일찍 퇴근하여 시간이 남았고, 우연히 놈이 눈에 띄었다. 막대기를 구해서 의자를 놓고 놈을 떼어냈다. 잘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의 회생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허실 삼아 놈의 등에 흠뻑 물을 뿌려 주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녀석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오랜 중병을 앓고 갱생하여 비쩍비쩍 걷는 자식 놈을 대견하게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닮아 있었다. 놈을 밖으로 내보내기로 작정했으나 탱탱 가물기만 한 날에 놈을 내보낼 수는 없었는데, 마침 오늘 비가 온 것이다.
여기까지 쓴 나는 또 밖에 나와서 녀석이 앉아 있는 종이를 들고 텃밭으로 간다. 거기에는 고추도 있고, 가지도 있다. 상추도 자라고 있다. 나는 놈을 그 텃밭에 놓아 주었다.
출근할 때 놈이 아직 제 자리에 있나 하고 살펴보았는데, 없다. 녀석은 풀잎 속에 몸을 숨기고, 내가 심어놓은 채소를 향하여 기어갈 것이다. 어렵고 힘들면 제 껍질 안에 들어가 쉬거나, 제 몸의 체액을 발라가며 기어가리라.
저녁엔 텃밭의 상추를 뜯고 저녁상을 차려 나같이 자취하는 동료들을 불러야겠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