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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노 Oct 06. 2023

고독이 시작된다면

空 (기점)

 고독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애정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애정이 끝났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나의 정열적인 마음이 식어 건조하게 메마른다는 것이다. 애정과 사랑의 뜨거웠던 흐름이 끝난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서로 간의 기류, 그 안에서의 온기는 굳다 못해 모두 부서져버린다. 부서진 애정의 잔해와 조각은 누군가 혹은 오늘날의 나에 의해 짓밟혀 하얀 가루가 되어버린다. 무언가 거름이 된다는 것은 다음에 피어날 꽃들의 양분이 되곤 하는데, 식어버린 애정은 거름이 되지 못한다. 땅 속 깊숙이 파고들어 내일을 향한 감정선의 뿌리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이 하얀 가루들은 뿌리에 흡수되지 못한 채 뿌리를 썩게 만든다. 양분이 되어 예쁜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닌, 뿌리 곁에 겉돌며 성장을 방해한다. 지워지지 않는 하얀 흉터가 되는 지난날의 애정은 뿌리 전체를 하얗게 뒤덮고 나서야 검게 물들고, 뿌리를 통째로 가루로 만든다. 이때의 가루는 그 어떠한 색보다 어두운 검은색이다. 식어버린 애정이 하얀 가루가 되어 내면 안쪽으로 침투하는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애정 감정선 자체를 파괴해 버린다. 하얗게 시작했던 것들이 모든 색들을 빨아들여 검게 변한다. 수줍게 시작했던 사랑이 빛을 바래가는 과정의 결말은 이렇게 잔혹하다.
 본격적으로 작문하기 앞서, 나의 愛 (애정)의 시리즈는 당분간 막을 내림을 알리고자 한다. 서로 등을 돌렸다는 것, 즉 이별을 경험했다는 것은 당분간 나올 것들이 상실감 혹은 고독하다는 감정과 연관 있음을 시사한다. 空, 비어있다를 뜻하는 이 한자는 '고독'을 의미한다. '고독하다'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둘째, 어려운 일을 당하여 몹시 애씀. 또는 그런 고생을 뜻한다. 물론, 두 고독은 한자와 유의어 모두 상이하기에 명백히 다른 단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애정을 잃어버린 후 다가오는 상실감과 좌절, 그리고 슬픔과 동반되는 이 '고독'은 두 단어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진정한 고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고독은 空, 비어있는 것이다. '비어있다'는 의미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는 의미이다. 애정이 사라지고 나면 나를 채우던 사랑의 감정이 모두 부서져 하얗고 검은 가루가 되어버리기에 텅 비어있다는 것은 적절하다. 무언가를 메우고 감싸고 있던 것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비로소 진정한 내면 혹은 알맹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텅 비어있다는 것은 진정한 내면 그리고 알맹이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누군가와의 감정적 교류에서 얻은 애정과 사랑이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비어버릴지도, 공허 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를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어떠한 그림이 연상되는가? 어떠한 때도 묻지 않은 하얀 바탕이 생각나는가? 그게 아니라면 어떠한 빛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암흑인가? 각기 다른 의견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잿빛' 혹은 '핏빛'으로 여긴다.
 잿빛은 흔히 회색이라고 표현한다. 흰색과 검은색의 조합, 음과 양이 어우러졌을 때 발하는 독특한 색. 희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찌 보면 흐리멍덩하고 칙칙한 색. 이것이 잿빛이다. 애정을 잃어버린 이가 진정으로 고독해질 때 잿빛이 되는 이유는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고, 슬픔에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모든 인과와 좋지 않은 결말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도 모르는 상황.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을 연상하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얻게 된 특정 색을 잃어버린 이는 공허해진다. 비어버리게 된 그 사람은 자신의 본래의 색, 즉 정체성이자 내면 혹은 알맹이가 진정으로 어떤 색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색으로도 쉽게 물들 수 있는 흰색이었는지, 아니면 그 어떤 색이든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물들이는 검은색이었는지.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기에 혼돈에 빠진다. 이러한 생각의 혼란은 자아를 불안하게 하며 심각할 경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내면을 스스로 파괴한다. 흑과 백 사이에서의 어중간한 판단으로 인해 부서져버려 섞이게 돼버린 어중간한 자아, 어중간한 색. 애정과 사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빛을 바래버린 진실된 자아, 그것이 잿빛이다.
 왜 붉은빛이 아닌, 핏빛으로 정의하였는가? 혈액의 농도를 압축한 특유의 새빨간 붉은빛은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아름답고, 어찌 보면 잔혹한 이 짙은 농도는 흔히 사랑을 대변하는 색이다. 흔히 우리는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표현하고 붉은색으로 칠하곤 한다. 정확히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 그러한 약속을 따르고 있다. 사랑을 상징하는 이 붉은빛이 어찌하여 고독과 공허를 상징한다고 주장하는가? 애정을 잃어버린 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상처가 생기면 피가 흐르고, 그 피는 공기와의 반응을 통하여 '딱지'라는 방어체계를 구성한다. 딱지가 혈액을 응고하고, 알아서 떨어나가기 전에 인위적으로 그것을 제거하거나, 같은 부위에 또다시 상처를 입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상처는 덧나고, 크기가 확장되며, 이내 '흉터'로 남는다. 흉터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즉, 죽을 때까지 내 몸에 남아있는 '자연적 문신'인 것이다. 사랑을 뜻하는 붉은색이 그 어떠한 것들보다 붉고 진한 농도의 붉은 상처를 만들고, 같은 부위의 상처를 계속해서 도려낸다. 애정을 잃었기에 파이고 패이는 그 상처는 끊임없이 덧나고 커지다 못해 끔찍한 흉터로 변모한다. 흉터가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빛바랜 붉은빛이나 어두운 색을 띤다는 것을.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 특히 그중에서도 애정과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비어버린 다는 것이 아닌 지울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이러한 이유에서 고독과 공허는 유독 붉은 핏빛이자 빛바랜 붉은색을 상징하지 않을까.
 고독이 시작되었다면, 애정이 이미 끝났거나 곧 끝나갈 무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고독해지고, 공허해지고 외로움에 빠져 상실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싫어할 것이다. 그렇기에 고독해지거나 공허해지지 않고자 마음의 문을 미리 닫아버리는 이들도 있다. 최대한 적은 상처를 받기 위해 사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이들도 물론 존재한다. 이러한 행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조심스레 '이러한 고독을 한 번 체감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라는 진지한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왜 굳이 힘든 경험을 맛보라고 하는 것일지 의아한 것은 당연하다. 알고 있지만 제안을 하는 것은 다음번에 찾아올 진정한 애정과 사랑을 느끼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종점은 이별이라도 계속 입에 넣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랑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달콤한 이유는 이별이 너무나도 씁쓸하기에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지난 글에 서술한 적이 있다. 진정한 단 맛을 느끼고 싶다면, 특유의 쓴 맛으로 입을 한 번 헹구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어두운 것을 알아야 밝은 것을 체감할 수 있고, 차가운 것을 알아야 따뜻한 것을 느낄 수 있음과 동일하다. 진정으로 고독을 맛본다면, 내가 해왔던 사랑이, 내가 주고받았던 애정이 얼마나 달콤하고 따뜻했었는지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진정으로 고독 자체를 즐겨본다면 그 과정에서 얻는 애정 교류의 깨달음과 다음 날 사랑에 대한 준비과정을 더욱 철저하게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충분히 존재한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이지 않을까. 고독과 공허를 즐기고 있을 미래의 나와 어느 날의 누군가에게 전해본다.
 "나의 고독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당신의 고독은 어떠했는가. 흐리멍덩하고 어중간한, 빛을 바랜 잿빛이었는가 혹은 그 어떠한 농도보다 짙은 혈액의 핏빛이었는가. 내가 맛보고 즐긴 고독이라는 감정과 공허의 감정은 무슨 맛이 났는가, 달콤한가? 쌉싸름한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기분 나쁜 담백함인가? 어떠한 맛을 입안 가득 풍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풍미를 진정으로 체감했다면 먼 훗날의 또 다른 나와 그리고 또 다른 당신은 분명 행복하겠지. 행복해져야만 하겠지. 내가 잃어버린 사랑이, 그리고 애정이 하얀 가루가 되어 검게 변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뿌리를 지켜주는 노란 햇살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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