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exibility
역시나 많은 물을 삼켰고, 코끝까지 맵게 올라오는 물 맛에 여러 차례 허우적거렸다. 20분 정도 후에 도착할 빵집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팔을 움직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이대로 물 속에서 잠들면 편하겠다. 그래도 물이라면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내가 물 위에 둥둥 떠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니 장족의 발전이네.
어떤 스트레스가 있어도 잠은 너무 쉽게 든다며 카라멜 맛이 나는 팝콘을 입에 마구 넣어대던 수영이가 떠올랐다. 하루 평균 9시간에 가까운 잠을 자던 수영이를 나는 자주 날선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주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 시간 아깝지 않아?
- 시간은 쓰라고 있는 거야. 늘 말하잖아.
시간에 관해 내가 하는 말은 늘 '효율적인 시간 분배'에 관한 것이었고 수영이는 그런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쓰는 법'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시간은 아끼라고 있는 게 아니라 잘 쓰라고 있는 거라고.
수영이는 매일 9시간 푹 자고 일어나서 방을 한 두 바퀴 돌고 난 뒤 천천히 씻고, 30분은 걸리는 먼 곳으로 굳이 빵을 사러 갔다. 단골가게가 생기는 게 삶의 낙이라고 했다. 먼저 묻지 않아도 새로 나온 빵을 알려주고, 오늘은 포카치아랑 크로와상 중에 어떤 것 드려요? 하고 물어보는 직원 언니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 좋다고. 그러다 가끔 다른 빵을 고를 때 오는 쾌감이 있다던가. 내겐 지나친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런 마음이 가득 드러나는 표정으로 늘 수영이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빵은 늘 수영복과 수건, 물안경이 들어있는 커다란 가방 안에 담겼다. 수영이 끝나면 아침에 산 빵을 허겁지겁 먹어버리곤 해서 나는 거의 매일 수영이가 어떤 빵을 샀는지 알 수 없었다.
또 하나 수영이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요리였다. 역시나 내가 가장 못하고, 아니 그보다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다. 우린 언제든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고, 아주 여러 옵션을 적용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준비하고 치우는 일에 시간을 쓸 필요가 없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요리를 할 시간에 다른 것들을 할 수 있었다.
- 따뜻한 토마토 볶음요리 마지막에는 꼭 화이트와인 식초를 살짝 뿌려줘야 해. 이 향과 맛이 아주 다르게 변한다고. 너가 혼자 먹게되면 꼭 그렇게 해. 여기 밑에 열면 있다? 들었지?
아마 식초를 꺼내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가볍게 무시했다.
- 내일 영화볼 수 있지? 9시야. 늦으면 안 돼! 시작 전에 나오는 영화 예고편까지 같이 봐야 해.
- 알아, 알았어. 늦지 않아.
집을 나오면서 수영이가 만들어준 작은 번 하나를 입에 넣으며 사무실로 향했다. 이 번 진짜 부드럽네.
그때의 나는 수영이가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게 싫었던 걸까, 아니면 허우적거려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결코 무리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가 한심하게 느껴졌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힘든 내색도 하지 않는 수영이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릴까 두려웠던 걸까.
어느 날부턴가 수영이는 수영을 하러 가기 전 빵집에 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두 세 가지는 넣었을 조미료가 빠졌다는 것을 내 입맛도 알게되었을 무렵에는 수영을 그만두었다. 영화를 보는 횟수도 줄었다. 느렸던 수영이의 시간은 점점 아르바이트 대타, 식당 보조, 청소 도우미와 같은 일들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수영이가 영화보고 요리할 시간이 어딨어, 하루가 이렇게 짧은데- 라며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때 수영이에게 물었어야 했다. 무슨 일 있어?
수영이는 곁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았다. 대신 잉여롭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촘촘하게 삶에 엮어 튼튼한 보호막을 만들었다. 내가 보호막이 되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어땠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듣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어보는 방식으로.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나는 수영을 시작했다. 운동도 음식도 최단시간 최대효율을 따지던 나는 득과 실을 따지지 않고 무작정 수영이가 하던 것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너는 왜 그날 거기에 갔는지, 그날 밤에 왜 휴대전화 너머로 차디찬 파도소리만 들려주었는지, 수영에 자신이 있다던 너는 왜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지, 지금도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지 알고 싶어서. 수영이 끝나면 꼭 빵을 사러 간다. 너처럼 나도 매일 다른 빵을 사. 너도 가끔 그 빵집을 생각해?
언젠가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