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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Aug 24. 2023

초대

Power


그는 아주 효율적인 사람이라 책과 영화를 사랑한다고 했다.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게 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내게 그는 늘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감상을 공유하는 방식이 좋았다. 인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외우고 그 인물의 어떤 면이 구체적으로 싫거나 좋았는지, 그리고 어떤 면에 동해서 때론 판단이 어려워지게 되어버리는지. 그런 것들을 공유할 때 그의 동공이 커지는 걸 느꼈다. 그런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한테 너가 말하는 예술적 감각같은 것은 없어. 난 그냥 가장 적은 에너지를 들이면서 죽기 전까지도 다 할 수 없을 모든 경험들을 할 수 있어서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거지. 그는 쉴 새 없이 요란하지 않은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욕망하고 즐겼다. 나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거의 모든 감상들이 좋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 환경운동을 업으로 하는 그를 주변에서 추켜세우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공대를 졸업하지 않은 내가 환경이 내 문제라고 늦게나마 알게 되면서 할 수 있는 일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 공대를 졸업한 이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혹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자신은 찾을 수 없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 자신에게 주어진 운과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구분하려고 애쓰는 사람. 그런 그는 나를 자주 이해할 수 없었을테지만 그런 순간에도 어떤 섣부른 위로나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 대신 눈을 빤히 바라보며 내 표정을 살피고 그 중 몇 번은 꼭 안아주는 사람. 자신이 가진 에너지와 책임을 명확히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소진하는 사람.


종종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 혼자 살며 스스로를 가꾸고 온갖 향과 비싼 가구와 옷들을 소개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터질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관점이 없는 단정함은 내게 최악이기 때문이다. 작고 초라하고 조금은 지저분해도 늘 누군가가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된 차나 커피, 작은 다과 정도가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명확하고 다소 건조한 그와 처음 번호를 주고받았을 때 나는 덜컥 우리집으로 그를 초대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일주일 뒤 그가 나를 먼저 초대했고 어떠한 엄청난 크기의 해방감을 느꼈다. 아,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의 초대를 받자마자 나는 바로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 커피 좋아해요? 집으로 초대해도 될까요?



그의 집은 우리집에서 많이 멀지 않은 강서구 어디쯤에 있었다. 좋아하는 샌드위치가 파는 동네여서 반가웠다. 숨이 조금 차는 정도의 경사진 골목을 지나 지도에서 가리키는 부근에 다 와갈 무렵, 멀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입고 있었던 까만셔츠가 눈에 띄었다. 2층에 있던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방금 초를 불어서 끈 것 같은 냄새가 났다. 달짝지근한 탄내. 내가 조금 킁킁거리자 그가 머쓱해했다.


    - 아, 환기도 할겸 잠시 초를 켜두었는데. 냄새가 불편한가요?

    - 아뇨. 저 이런 냄새 좋아해요.



서둘러 여러 권의 책들이 쌓여있는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 책상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두 개의 작은 머그컵과 디카페인 커피 티백, 작은 봉지에 들어있는 바나나 과자가 있었다. 자리에 마주 앉은 우리는 자연스레 그의 일과 나의 일, 몇 주전 그 강연에 왔던 이유, 혼자 외로울 때 하는 일과 같은 것들에 대해 나누었다. 그 바나나 과자에서는 짭쪼름한 감자 맛이 났다. 바나나향이 나는 감자칩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먹는 모습을 본 것인지 찬장을 열어 양파맛 감자칩을 꺼내주었다. 나와 처음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이 작은 집이라니. 내가 먼저 초대하고 싶었는데.


그날 밤 그에겐 누추한 이곳에 와주어 고맙다거나 내어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는 태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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