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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Apr 05. 2023

설탕과 소금

Flexibility


우리가 만났던 두 번째 날에도 그 애는 질문이 많았다. 종교와 영성(spirituality)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모두'에 동성애자가 포함된다고 말하는 종교인을 본 적이 있는지, 꾼 꿈을 자고 일어나서도 생생하게 말할 수 있는지, 어떤 이사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마요네즈나 케찹을 좋아하는지. 처음 만났을 때는 설탕 가루를, 그 날은 소금을 손가락에 찍어 먹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비건 타진(tajine) 요리를 아주 급하게 많이 먹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정신을 소란하게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처음 먹어보는 그 요리를 두 그릇이나 배불리 먹었다. 그는 이렇게 눈 앞에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기분에 따라 매일 다른 조합을 할 수 있는 간단한 스트릿 푸드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 애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 목소리를 변조해서 꾀꼬리 소리를 냈다. 그건 아주 좋은 요리에 더해진 향신료와 같은 역할을 했다. 대화를 하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하는 동시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재잘거림은 사람을 가려서 누군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 애가 이렇게나 수다스럽다는 사실을 내가 알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하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매일 5시간 씩 자며 황급히 일어나 할 일을 하는 삶과 여유롭게 2주 동안 멀리 떠나버리는 삶 사이의 중간을 찾고 싶은데 여간 쉽지 않다며 또 소금을 한 꼬집 입에 털어넣었다.


동시에 내 고민을 또 다른 나의 자아 이미지로 바꿔주기도 했다. 아주 한순간에. 예를 들면, 스스로 대화에 잘 끼지 못하는 소극적이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겨왔다고 이야기하면 "많은 말을 하기 힘든 신비로운(mysterious) 이미지로 밀고나가자!" 하는 식이었다. 그 애의 말을 속기록으로 옮긴다면 모든 문장 끝에 느낌표(!)가 붙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학생부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던 그 애는 화학과 대학생이었고 거식증을 앓은 경험으로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일종의 취미였다. 당시 미국의 모든 것이 낯설던 내게 그는 미국 그 자체였다.


그가 나를 집으로 초대해 말랑말랑한 모찌떡을 만들어주었을 때 나는 그의 느낌표스러운 말과 행동들이 갑작스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날도 그는 설탕 가루를 찍어 먹고 있었다. 아주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그가 눈이 아플 정도로 지나치게 밝다는 생각을 들게했고, 서툴게 한 마디라도 더 얹고 싶어졌던 마음은 어서 이 대화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뇌는 긴장하고 있지 않은데 마음은 떠나고 싶어서 애타했다. 그 애가 내 삶 속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이 싫어졌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던 내게 화려하게 다가온 그 애 덕분에 대학생활이 편해졌지만 시간이 지나 내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질문이 많은 사람보다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몸짓으로 반응하는 친구가, 설탕과 소금을 아끼지 않는 파스타와 케이크보다는 심심하고 싱싱한 샌드위치가, 즉흥적인 초대보다는 계획된 만남이 더 소중해졌던 내게 그 애가 결국 징그러워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늘 밍숭맹숭, 성적도 성격도 애매모호한 애로 지내다가 이곳에서 취향이라고 할 법한 것들이 생길 무렵 나는 고작 20살이었다. 개성(individuality)은 좋은 것이 아니었나. 고마움이 부담이 되어버린 순간 나는 내가 갖게 된 취향이 미워졌다. 내가 선명해질수록 가까운 사람은 흐릿해지는 관계라니.


지난 10년동안 내 취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는 어떤 새로운 집단에 가도 분명한 캐릭터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10년 전과 다를까? 나이가 들수록 관계망이 좁아지는 건 개성이 뚜렷해져서인가 자아가 커져서인가 기존의 나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인가.


이제 내 주위에 그 애처럼 설탕과 소금을 찍어먹는 지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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