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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Mar 30. 2023

언덕

Power


오르는 길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반복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엔 시작부터 포기하게 할 심산 것 같았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지만 반항한 적은 없었다. 오늘은 반드시 불만을 쏟아내리라 다짐하며 끝내 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론다에 도착한 지는 3개월이 조금 넘었다. 수련도 끝이 보인다는 말이다. 실은 수련 자체보다는 그를 만나러 온 것이기는 했다. 그 사이 이곳에서 요가원을 열어 수련을 하고 있을 줄이야. 석사논문을 무사히 제출하고 나니 밀려오는 허망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바로 연구원에 취직을 하기도 그렇다고 박사로 진학하기에도 용기가 없어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론다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 지낼 수 있는 곳도 제한적이었으나 그가 보내준 언덕의 노을 사진에 반해 무작정 오게 됐다.

여전히 하필 왜 그가 이곳에서 요가원을 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의 충동이었다.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주일이 넘는 여행은 질색하는 내가 평범한 언덕 사진에 반해 이곳에서 3개월을 지내고 있다니. 여전히 설명할 수 없다. 오늘은 그냥 그 정도로 그가 그리웠던 것이 아닐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았을 뿐.


가만히 멈춰 명상을 하거나, 혹은 조금 흐트러진 자세로 쉬고 있다가 나를 보며 웃을 때 특히 더 강해보인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그래서 내가 늘 불만을 그대로 삼켜버리게 된다는 것도.

그는 수련을 마치면 시선을 한 곳에 가만히 두고 그저 숨만 쉬는 경우가 잦았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자세였다. 그 숨은 아주 깊었다. 깊은 들숨과 날숨. 호흡이 짧은 내게 그가 늘 하던 말이 있었다.


    - 내보내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어쩔 수 없이 뱉어낸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렇게 느리게 쉬어봐.



1년 전 장례식장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도 그는 그렇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숨을 참아내면서, 그리고 억지로 쉬어내면서. 그때도 그의 숨은 참으로 길었다.

사람들은 그가 한가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혹은 그의 주변엔 악기운이 가득해서 그와 거리를 두지 않으면 결국 너도 죽어버리게 될 거라고도. 남아도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남은 가족들이 살지 않겠냐고. 그렇게 기가 세던 애가 어쩜 저렇게 풀이 죽어 무책임할 수 있냐고, 혹은 그렇게 기가 세서 지 아빠가 죽어버린 게 아니냐고. 그런 말들을 듣고 있기가 버거워서 그와 나 모두 결국 그 곳을 떠나버렸다. 어쩐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그의 곁인 것 같아서 그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됐다.


장례식장에서 그를 만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때 그가 속해있던 교지 편집부 이름을 검색해봤다. 홈페이지에는 "주소를 이전했으니 이곳으로 접속해주세요" 하는 문장과 새 주소 링크, 2015년 이전까지의 글들이 쌓여있었다. 새로 접속하라는 주소를 복사해 붙여넣으니 알 수 없는 보험회사 홈페이지가 떴다. 딱히 다수에게 공유하고 싶은 글도 사진도 없어서 SNS를 사용하지 않는 내가 새 주소를 찾아 최근 글들을 읽어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험회사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에게 연락을 해버린 것이다.


    - 잘 지내?

    - 나는 스페인 론다에 있어. 보러올래?



대학을 다닐 때 꼭 그런 애들에게 관심이 갔다. 글과 말에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가 느껴지는 사람, 어떤 기사를 읽고 종종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사람, 그렇지만 지나치게 비장하지는 않은 사람. 화를 동력으로 좀 더 잘 미쳐보려고 애쓰는 사람.

그는 일상에서도 줄곧 그랬다. 한번은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를 부르는 중년남성에게 성형을 제안(강요)받은 적이 있었다. 학생은 턱만 좀 깎으면 너무 예쁘겠다. 그는 가만히 중년남성의 눈을 바라보다 카운터로 돌아왔고, 그 남성이 계산을 마친 이후 영수증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 어디서 내 얼굴 평가할 주제도 안 되는 게.


나중에 들어보니 그렇게 말하고 한 대 맞으려고 했단다. 그럼 경찰이 올 거고 일이 더 커질거고, 그게 전혀 두렵지도 않고 꿀릴 것도 없으니 잘 된 것 아니냐고. 어깨만 으쓱하고 맞기 직전까지 가는 일이 하루 이틀이냐며 웃어넘기는 그가 가진 그런 끝끝내 분노하는 태도를 잊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요는 없었다.


    - 모든 경험과 고통이 삶에 도움이 되지는 않잖아. 죽을 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은 영원히 하지 않아도 돼.


실은 그 말이 마음이 아리도록 고마웠다. 나는 어떤 순간에도 그렇게 할 자신이 거의 늘 없었기 때문에 만일 그가 함께할 것을 요청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해주어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그와 멀어져야 했다.


이곳에선 3개월 동안 혼자 오르기 힘든 길을 기어코 오르게 하는 힘이 그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어서 매일 언덕을 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너의 마음 속이 얼마나 바쁜지 헤아려보려고. 아마 나는 이 평온한 곳에서 너를 끄집어내고 싶어 이곳에 온 게 아닐까. 네가 보내준 언덕이 너무도 차분해서 두려웠던 거야. 이제 내게도 조금의 용기가 생겼으니 우리 다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조금씩 뿜어내며 살자고, 그렇게 제안해보려고. 그러고 싶은 마음에 오게 됐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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