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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Jun 16. 2023

어린 시절

Power



요즘은 하루에 한 번 강연을 찾아 다닌다. 자기 전엔 뭔가를 읽고 밥을 먹을 때는 뭔가를 본다. 무언가를 계속 뇌에 넣는다. 내 뇌가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 사고할 수 있도록 스토리가 있는 내용을 욱여넣는다. 그러면 이른 밤 쯤 지쳐서 까무룩 잠들어버릴 수 있게 된다.


1시간 30분 정도의 강연에 다녀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이후의 삶을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쳤던 사람, 그림을 그렸던 사람, 무용을 했던 사람, 해외에 살았던 사람, 그런 사람들은 커서도 그 일을 다시 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뇌가 조금 더 말랑말랑하던 시절에 어느 정도 지속했던 일들이나 생활력에 대한 감각은 몇 년 중단하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몸이 자연히 그런 것들을 찾아나서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 몇백면체 정도 되는 주사위가 랜덤으로 굴려져 한 면을 배당 받으면 죽는 순간까지 그 주사위의 다른 면으로 뒤집기가 어렵다는 것. 그래서 한 순간의 혁명적인 변화를 꿈꾸는 대신 바라는 바를 계속해서 그저 해야한다는 사실.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해야한다는 사실. 이 강직한 마음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으니 어떤 식의 유연함을 늘 지녀야 한다는 사실. 강연자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 수 있으나 나는 하루종일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나 하나 바꾸기가 이렇게 힘든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어", 늘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애쓰는 A를 떠올렸다. A는 어떤 글을 출간하기 위해서 쓴다면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믿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할 것, 그 말을 인물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 어느 날은 통화로 이런 말을 하며 서글퍼하기도 했다.


- 내가 쓰고 싶은 걸작은 외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였거든? 애틋하지만 서로 어느 정도 닮고 싶지 않아하는 세 명이 겪어냈던 웃기도 울기도 어려운 사건들을 잘 변주해서. 근데 어제 최은영 작가님이 <밝은 밤>을 출간하셨더라고? 읽고 나니 쓰고 싶은 걸작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더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그걸 훨씬 더 잘 가공해서 세상에 내놓으셨길래, 아 내가 또 늦었네 또 늦었어- 해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딱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방학숙제인 일기만큼은 누구보다 성실히 꼬박꼬박 써왔던 A는 끝내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A는 소설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안다. 다만 글이 닿은 어떤 이가 세상을 바꾸고 싶어질 때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작은 영향이라도 줄 수 있는지 알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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