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exibility
C에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려 했었지. 넌 모두가 가는 길을 어설프게 따라가느니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차라리 엉망이 되는 게 낫다고 했었어. 나는 그때만 가질 수 있었던 우리의 용기가 참 그리워.
어제는 영화관에서 Are you there god? It's me, Margaret 이라는 영화를 봤어. 딸인 Margaret과 엄마인 Barbara가 소파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맞대고 삶이 참 힘들다, 그렇지? 라고 이야기하던 장면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어. 친구와 화해하게 해달라고 밤마다 신을 찾아 기도하고, 삶의 전부가 친구였던 때도 떠오르더라. 매일을 신에게 기도해도 상황이 안 좋아지기만 하니까 Margaret이 나중에는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써.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방학이면 두 세 권은 쓰던 일기장, 판서에 꼭 내 생각을 함께 적어두었던 필기장, 한 권의 책을 요약해서 그렸던 마인드맵과 같은 것들을 선생님께 검사받던 순간을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나.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신이 아닌 담임선생님께 의지하기 시작했었거든. 보이지 않는 것에 기대는 대신 일단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었겠지. 우리의 다짐처럼 말이야.
넷플릭스에 있는 From Scratch라는 드라마에선 주인공인 Amy와 Lino가 계속해서 힘든 상황에 직면해. scratch에는 긁힌 자국이라는 뜻이 있잖아. 보는 내내 상처가 나고 아물고, 다시금 상처가 나고 또 다시 아무는 과정이 반복돼. 그럴 때마다 주변사람들에게 의지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 새로운 상황에서 처음 해보는 것들을 마주해.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 누구도 혼자이지 않은 게 정말 좋더라.
처음이 두렵지 않으려면 그 순간에 누군가가 늘 곁에 있어야 하잖아. 우리가 시도했던 모든 새로운 것들의 곁엔 항상 서로가 있었던 것처럼. 뭔가를 계속하게 하는 건 나 혼자만의 의지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곱씹어봐. 어떤 공간에선 주변 사람들 덕분에 그 의지가 생기기도, 있던 의지가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몸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는 순간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누군가 내가 헤매는 순간 나의 중심이 되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어제는 우연히 들른 작은 독립서점에서 윤슬인지 구슬의 표면인지 구분되지 않는 짙은 푸른빛의 책 표지를 보고 마음이 빼앗겼는데, 뒷면에 이런 말이 적혀있더라.
"그래, 이걸 재능으로 삼자. 10분이면 다다를 거리를 2시간씩 걸려서 가는 것을 재능으로 삼자."
이 문장은 책의 표제작인 <외로운 재능>의 가장 마지막 문장이야. 이 문장 바로 위엔 이런 말이 있어.
"앉았다가 힘을 얻으면 다시 일어나 나아가면 될 일."
너는 오늘 앉아있는 중일까, 힘을 얻는 중일까,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을까,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을까.
요즘엔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것도 힘에 겹다던 말이 생각나 이 편지를 써.
서로의 중심이 되어주었을 때도, 오랜 시간 혼자여야만 하는 때도, 일단 뭐든 해보면서 상처나도 아문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지금은 잠시 앉아볼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