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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Nov 27. 2023

구원

#4.

미주는 자신이 쓰는 글과 삶을 살아내는 속도가 병렬적으로 일치되도록 항상 노력했다. 어쩌면 미주가 런던에서 가장 애쓴 것은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 쓰는가,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만 쓰는가, 그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이 미주의 박사과정 거의 전부였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일은 행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고, 미주는 자주 생각했다. 미주에게는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삶의 속도가 언제나 늦었다. 일단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하는 데에만 2년이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2년이 지났다고 하여 삶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네 집에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세계 이곳저곳에서 현장연구도 해야했다. 현장연구를 하는 동안의 생활을 유지할 돈도 필요했다. 주변 친구들은 미주가 졸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러나 미주는 자신이 쓰는 글이 미주의 삶을 부르면 그 목소리를 쫓아가려고 달렸다. 미주는 레일의 철길 간격, 열차의 접촉면 기울기, 선로 유지보수, 동력까지 골고루 살펴가며 질주하는 기관차. 그리고 나는 그 기관차가 잠시라도 내가 있는 역에 서기를 바라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미주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한 권은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이었다. 타자가 된 사람의 외로움, 고독, 그리움, 오묘한 차별과 불편한 시선, 모멸감, 그러나 기어이 살아가는 힘을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 그런 것들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글을 쓰는 줌파 라히리의 태도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했다.


- 그런 사람이 언제나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을 알아야, 그제서야 그 사람의 글로 관심이 옮겨 가. 그 정도로 진심인 사람, 잘하고 싶은 일엔 그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건 미주의 책 취향이라기보다는 삶의 태도에 가까웠다.


힘은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누군가의 구원이 필요했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먼저 함께할 것을 제안해주는 사람,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어딘가로 질주하고 있는 사람의 곁눈질. 미주의 제안은 위로도 힘도 사랑도 아니었다. 구원. 미주의 제안은 구원이었다. 그러니 속수무책이었을 수밖에.


.


주말이라 공항에는 사람이 붐볐다. 공항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미주와 헤어지기 1년 전 정도 둘이 함께 더블린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미주의 중요한 면접을 몇 주 앞둔 시기였다. 두리번거리니 조그마한 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가방을 이고 지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쥐어주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아이는 청색 바지와 예쁜 베레모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머리에 꼭 맞는 사이즈, 키에 알맞는 바지, 옷에 음식물이 묻어도 티가 잘 나지 않는 어두운 색 코트까지. 아이는 엄마로 보이는 사람의 사랑을 받아 예쁘게 입고 나왔구나, 생각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니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티켓을 몇 장 쥐고 돌아왔다. 아빠로 보이는 사람과 엄마로 보이는 사람 간에 어떠한 대화도 없었지만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자연스레 티켓을 받아들고 가지고 있던 음료를 건네고 주변의 짐을 정리하며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무엇을 견뎌내고 있는지.


아빠는 붕어빵을 사오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 아주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가 꼭 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아빠의 결심이었다. 오늘은 지난 일주일 간 담아둔 화를 엄마에게 폭발시키리라, 때로는 약하고 약한 강아지에게, 가끔은 지지 않는 나에게, 아주 드물게는 숨어있는 내 동생에게. 엄마는 참지 않았으나 날이 밝아오면 없었던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면 없었던 일이 되었다. 지금와서 누군가 그때 바랐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사과라고 답할 것이다. 아빠. 용서를 구하지 마, 사과하기 전에는.



- 일찍 오셨네요. 커피 드실래요?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차에 마침 그녀가 도착했다. 청록색 코트에 베이지색 슬랙스, 편한 흰색 운동화, 화장기 없는 조금 지친 기색이 보이는 얼굴. 나는 나의 제안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했다. 그녀도 몇 년 전 나처럼 누군가의 구원을 바랐을까, 그래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그저 쉬러 가는 길에 몇 번 얼굴을 본 이가 동행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았던걸까. 내가 아니었어도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나였기 때문에 받아들였을까.

커피는 괜찮아요. 날이 벌써 많이 춥네요. 간단히 대답하고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잔 사오겠다며 자리를 뜨고 금세 돌아와 옆에 앉았다. 커피향이 좋아요. 그녀가 살짝 웃었다.


- 어제 영화를 보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잤더니 잠이 조금 오네요. 어제 저녁에 뭐하셨어요?


짐 조금 챙기고 바로 잤어요. 간단히 대답했으나 실은 긴 꿈을 꾸었다. 미주와 헤어진 뒤 계속해서 꾸다가 지난 몇 달 간은 잠시 꾸지 않았었는데. 눈사람이 녹는 꿈. 그걸 보고 누군가 엉엉 우는데 눈사람은 계속 녹고 누군가는 계속 우는 그런 꿈.


- 엄마에게 사진을 받았어요. 최근에 모카포트를 사셨다는데 처음 내려 본 커피라면서 이걸 보내주시더라고요.


그녀는 어떤 대화 주제든 자연스럽게 꺼냈다 집어넣었다.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보다가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커피 이야기로 돌아와 그녀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잔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여행을 갔을 때 사다드린 컵이라고 했다. 

나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단 하나 있다. 엄마와 나, 동생을 타고 돌아다니던 돌봄의 잔상들을 글로 맺는 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옮겨다닌 집과 직장과 같이 오간 장소들에 남은 흔적들을 언어화하는 일. 그리고 그 글과 함께 나무 밑에 묻어지는 일.

그녀가 자연스럽게 이야기 소재를 바꾸면 내 생각은 이렇게 그 소재들을 따라 마구 흔들렸다. 도무지 대화를 주도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꺼낸 대부분의 대화 소재들이 미주, 엄마, 동생을 자꾸 떠오르게 했다. 정확히는 조금 더 밝은 버전의 미주가 내 뇌를 꾹 누르며 무의식 저 편에 감춰둔 엄마와 동생 이야기를 자꾸 길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자꾸 끌렸다. 분명히 고통스러운데도, 답이 없는 문제임에도, 크나큰 상처였음에도, 웃음보다 눈물이 먼저 나는 이야기임에도. 그래서 먼저 꺼낼 말도 없으면서 그녀 옆에 붙어다니고 싶었다. 그녀가 시작한 이야기들에 매달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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