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그린웨이 걷기대회
'벌써 1885번이라고?'
지난 6월 14일 토요일 오후 다섯 시 반. 한낮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일자산 잔디 광장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행사 시작이 다섯 시 사십 분이니까 늦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손에 받아 든 번호표가 1885번이라니. 앞서 엄청난 인파가 와 있었다. 웬 사람이 이렇게나 많지? 집에 있던 사람이 모두 이곳으로 모인 듯 잔디 광장을 가득 메웠다. 아이돌, 트로트 가수 콘서트를 앞둔 올림픽공원 입구처럼 광장은 시끌벅적하고, 활기찼다.
'강동 그린웨이 걷기대회'
서울 곳곳에 걷기 좋은 길이 많다. 강동구에는 '강동 그린웨이'라 이름 붙은 길이 있다. 이 초록길에서 해마다 걷기대회를 한다. 대회라고는 하지만 전혀 대회 같진 않았다. 그저 화합을 다지는 마을 대 운동회 같다. 먹거리가 빠진 단체 회식 같기도 하고.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도 상품은 없다. 제한 시간도 없어서 앞다투어 걷지 않아도 괜찮았다. 함께 줄지어 산책하듯 낮은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는 가벼운 코스였다.
'다 같이 돌자, 일자산 한 바퀴!'
올해로 98회째라고 했다. 떠들썩한 행사를 나만 몰랐었다. 걷기에 진심인 사람은 다 모였나 보다. 잔디 광장에 군데군데 걷기 동호회 현수막이 보였다. 어르신도 모여 앉아계셨다. '누구나 걷기'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출발 전 준비 운동이 요란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았다. 잔디 광장 앞쪽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태권도 시범단의 역동적인 공연이 있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화려한 동작을 보니 에너지가 전해지는 듯했다. 사람들은 연신 손 부채질하면서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행사장 가장자리에는 자원봉사자, 운영위원회 부스가 있었고, 잔디광장 위쪽에 건강 관련 부스가 눈에 띄었다. 강동구보건소와 후원사인 참잘함 한방병원에서 건강 체험 부스를 운영했다. 혈압과 혈당을 재고, 약침 치료와 마사지 봉사를 받는 분들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행사 식순이 이어지던 중에 오늘의 걷기 코스를 먼저 밟아보고 싶었다. 자유롭게 출발하는 분위기라 부정 출발은 아니었다. 몇몇 무리 틈에 출발했다. 광장에서 살짝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시끌벅적한 잔디 광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뜨거운 햇살이 나무 천장에 막혀 그늘이 지고, 서늘했다. 더위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저 멀리 무대 행사 소리가 나무 사이로 새어서 들리는 듯했지만, 산길은 고요했다. 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은지 알 것 같았다. 초록 흙길이 여름과 잘 어울렸다. 녹음이 깊어져 나무는 청청하고, 무더위를 잊어버릴 정도로 시원했다. 여름 피서지로 초록길을 찾아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 코스는 일자산 잔디 광장을 출발해 해맞이광장을 지나 출발지로 돌아오는 약 2.5㎞ 거리로, 4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평탄하고 시원한 숲길이라 우리 모두의 코스로 적절했다.
"이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계단 조심하세요."
코스 곳곳에 진행요원과 자원봉사자가 길 안내를 해 주었다. 이정표를 보면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지 않고, 여행 안내자를 쫄래쫄래 따라가듯이 편하게 초록길을 즐길 수 있었다.
걷기대회의 핵심 장소인 일자산. 위에서 본 모양이 한 일(一)자를 닮았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높이 134m 정도로 야트막한 산이다. 서울 둘레길 7코스의 일부 구간에 일자산이 포함되는데 7코스는 난이도 '하'이다. 트레킹보다는 산책이라고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다. 초급 코스라는데도 내게는 등산이었다. 오르내리는 40분 동안 헉헉대고, 체력이 달렸다. 평상시 운동을 멀리했으니 그럴만했다. 같이 출발했던 일행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른 일행이 뒤따라올 테고, 같이 걸으면 되겠지, 멈추지 않고, 사람들 틈에서 같이 가다 보면 도착하게 될 거니까. 인생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렇게 완주했다. 걷기대회 완주자에게는 행운권 추첨의 기회가 있단다. 당첨과 상관없이 잘했다고 칭찬받는 것 같았다. 큰일을 해낸 듯 뿌듯했다.
걷기대회 참가 후 보름 정도 지났다. 신선했던 그린웨이 경험이 그리워졌다. 사무실, 무더위 쉼터의 에어컨 바람도 좋지만, 천연 자연 바람과 초록의 시원함에 비교가 안 된다. '주변에 걸을 만한 또 다른 초록길이 있나?' 궁금함에 뒤적여봤다. 친절한 서울시는 누리집을 통해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서울 둘레길’ 코스가 벌써 21가지나 생겼고, 도시 근린공원도 생각보다 많았다. 조금만 나가면 초록길을 밟을 수 있다. 이번 여름은 피서지는 초록길로 정했다. 시원해질 생각에 벌써 설렌다. 찾았다! 초록길!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