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제퍼스 그림책 'It wasn't me'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왜 자꾸 싸워요?"
강동역 1번 출구 쪽으로 바삐 걷는데 뒤에서 남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이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들킨 것 같아 무안했을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벌기용 웃음이었을까?
내 뒤통수가 덩달아 화끈거렸다. ‘뭐라도 얘기해야 할 텐데.’ 걱정하면서 아이와 같이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웃음이 멎고, 할머니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랑 할머니 생각이 틀려서 그렇지. 그리고 싸우는 거 아니야. 얘기하는 거지."
‘이제 됐어. 잘 넘어갔네.’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아이의 다음 말에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그냥 주고받는 얘기와 싸움은 dB로 갈린다. 그 경계를 넘어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엄청난 목소리로 얘기를 하셨던 거다.
목소리 큰 놈이 장땡?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전달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목에 핏대를 세워서 목청껏 외친다. “이 연사 강력히 외칩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웅변하듯이 소리높여 내 주장을 내세울 때가 많다.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음이 소리에 실려 나가기라도 하는 것인지. 할머니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도 한 목소리 한다.
할머니의 설명이 이어지고, 난 더 부끄러워졌다.
“다 와서 강동역이라고 얘기하면 어떡하니. 내리기 전에 말해줘야지. 그래 안 그래?”
손자가 할머니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할아버지가 까먹었나 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두둔하는 말을 덧붙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할머니 못지않게 나도 아이의 질문에 많이 민망했다. 아이의 시선에 내 모습이 까발려지는 듯했다.
진짜 별거 아니었다. 안내방송도 나오는데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할까. 물론 그저 그날 할아버지가 미리 강동역이라고 안내해주지 않은 게 두 분 사이에 말싸움으로 번진 건 아니었을 거다. 그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 쌓였던 게 있었겠지. 서로에 대한 퉁명스러운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는 정말 눈곱만한 일로도 싸운다. 사소한 일로 언성을 높인다.
한가지 사건이 빌미가 되었을 뿐. 우리는 그저 묵힌 감정으로 싸우는 것 같다.
작가 올리버 제퍼스의 휴이 시리즈 중 그림책 'It wasn't me' 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의견이 서로 다른지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는 휴이 무리를 보고 한 친구가 묻는다.
“도대체 뭐 때문에 싸우는 거야?”
할말이 없긴 모두 마찬가지다. 딱히 이유가 없으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둥 얼버무린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말의 내용보다 말투로 싸움이 시작될 때가 많다. 상대의 말투에 기분이 나쁘고, 그런 마음으로 서로 싸우다가 결국 감정만 남는다. 그래도 감정을 오래 삭히지 않고, 해소할 수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씩씩대며 화가 났던 마음도 아무렇지도 않게 날려버릴 수도 있다. 이 그림책에서는 죽은 파리를 보러 가자는 말에 모두 신이 나서 의기투합한다. 좀 전까지 싸웠던 휴이 친구들이 맞나 싶다. 휴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죽은 파리 보러가는 일로 하나가 되었다. 내가 목소리를 높이려는 이유가 뭔지 그 마음을 먼저 들여다본다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싱겁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