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싸’와 ‘아까비’랑 같이 사는 세상
나는 뚜벅이다. 차가 없어서 길에서 잡아먹는 시간이 상당하다. 무슨 이유인지 눈앞에서 버스를 보낼 때가 많은데, 특히 1113-1번을 탈 때가 그렇다.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오가는 그 버스는 배차 간격이 10분 이상이라 한 번 놓치면 기운이 빠진다. 좀 더 서두를 껄껄~~ 거리며 후회해도 소용없다. 성질 급한 현대인에게 '버스 정류소에서 꼬박 10분 기다리기'는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던져 준 인내심 테스트와 비슷한 강도이다.
“이거 안 먹고 잘 기다리면 두 개 줄거야.”
고작 한 개의 유혹이 얼마나 강렬한지. 눈에 보이는 게 더욱 먹음직스럽다. 먹지 말라 하니 더 먹어보고 싶어진다. 고새를 견디지 못한 아이를 다그칠 게 아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평소라면 한참을 기다리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버스 도착 알림판에 1113-1번이 떴다. 곧 도착한단다. 으미~ 반가운걸.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인가보다. 버스가 멀찌감치 보이는데, 신호에 걸렸다. 한번에 넘어오지 못하고, 교차로에 멈춰버렸다. 아까비! 좀 있으니 신호를 기다리던 버스 뒤로 다른 버스가 줄줄이 붙는다. 내 버스가 먼저 갈 수 있었는데. 훨씬 앞서갈 수 있었는데. 잘 달리다가 신호에 넘어진 기분이었다. 따라잡히는 게 싫었을까? 뒤따라 달려드는 다른 버스가 괜스레 얄미웠다.
점심시간이었다. 부지런히 식당에 내려가서 식판 들고, 배식받으려고 줄을 섰다. 수저를 챙기고, 도라지무침을 담았는데 밥이 없다면서 좀 기다려달란다. 바로 내 앞에서 밥이 똑 떨어져 10여 분을 기다려야 하는 거였다. 서둘러 종종거리며 내려온 게 헛수고가 되었다. 나보다 훨씬 뒤에 온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뒤늦게 와서 바로 배식받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같은 상황이라도 입장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아까비’가 누군가에게는 ‘앗싸’가 될 수 있다. 내가 아까비 상황에서 구시렁거릴 때 ‘앗싸 가오리’를 외쳤을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1113-1번이 신호에 걸리고 뒤따라오던 버스를 기다렸던 승객이었을지도. 눈앞에서 번번이 놓치던 버스를 헐레벌떡 뛰어 간신히 잡아탔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아까 점심시간에 내 앞에 서 있었던 사람도 쾌재를 불렀을까? 자기까지 배식을 받고, 중단되니 강을 건너간 듯한 안도감이 들었겠지. ‘아까비’와 ‘앗싸’가 동시에 생길 때 여러 사람의 감정이 교차한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가 잃는 제로섬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은 즐겁고, 한 사람은 아쉬움에 억울하기까지 하다.
매 순간이 ‘앗싸’인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다. 로또나 추첨에 잘 걸리는, 특별히 당첨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고는 하는데, 일상이 ‘앗싸’로 도배된 사람은 없는 듯하다. ‘앗싸’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나한테도 왔다 간다. 그러니 내가 ‘아까비’ 할 때 누군가 ‘앗싸’ 한다고 해서 야박하게, 인색하게 굴 필요도 없다. 주거니 받거니 ‘앗싸’를 둥글게 둥글게 돌려쓰면 된다.
밀물썰물처럼 ‘아까비’와 ‘앗싸’가 왔다리 갔다리하는 게 일생 아닐까? 항상 ‘아까비’만 있는 것도 ‘앗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앗싸’의 기쁨이 큰 것은 ‘아까비’의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앗싸’가 쭉 계속되지는 않을 거고, '아까비'가 끝나는 시점도 있다. 그러니 ‘앗싸’만 욕심낼 필요도 없고, ‘아까비’에 처했다고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돌고 도는 인생, 순리대로 순간순간 충실하게 살면 된다. 그래도 2025년을 시작하는 시점에 긍정적인 기대를 해본다. 욕심은 내려놓되 계획은 원대하게 품어본다. 올해는 앗싸와 아까비의 비율이 7대 3 정도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