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이가 소리치는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월요일이면 가는 집이 있다. 놀이 시터로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 일곱 살 형과 다섯 살 동생, 남자아이 둘을 본다. 형제는 비슷한 듯 참 다르다.
둘 다 바깥 놀이터를 좋아하는데 그날은 나갈 때부터 제동이 걸렸다. 첫째는 고민 없이 한 방에 후다닥 외투까지 걸치고 나갈 준비를 끝냈다. 둘째는 방바닥에서 양말과 씨름 중이었다. 이놈의 양말이 영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 켤레째 바꿔 신었는데 이것도 불편하단다. 서랍장 속 양말을 모조리 꺼내 신어볼 태세였다. 둘째 아이 속에 까칠이가 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불편해."
이 한마디에 또 다른 양말을 건넸다. 촉감에 예민한 둘째는 까끌까끌한 양말이 싫다고 했다. 긴 양말은 종아리가 쪼여서 별로고, 작은 양말은 발에 끼어서 답답하고, 큰 양말은 발꿈치 부분이 헛돌아 불편하고, 두꺼운 양말은 갑갑하다고 투덜거렸다.
계속되는 빠꾸에 점점 지쳐갔다. 그러다가 지난번 아이 돌보미 교육받을 때 들은 게 떠올랐다. 배운 내용을 되새기며 마음을 도로 잡았다.
‘아이의 마음을 잘 읽어 주라고 했었지?!’ ‘불편했구나. 암요 그럴 수 있지.’
마음을 늦추니 편해졌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 아무거나 신으라고 보챌 필요도 없었다. 그 사이 형은 기다리는 게 지루했던지 자기 발에 작아진 양말을 동생에게 건네주며 신어보라 했다.
형아와 나는 까탈스러운 손님의 반응을 살폈다.
번번이 퇴짜를 놓던 이 VIP 고갱님이 드디어 맘에 드는 양말을 골랐다. 양말을 쪼물딱거린지 15분 만에 얻어 낸 여섯 번째 성공이었다. 미끄럼방지 고무가 발바닥에 잔뜩 붙은 두툼한 형광 노란색 양말이었다. 키즈카페에서 받은 양말이란다. 크게 다를 게 없는 듯한 양말을 고르고는 좋다고 하니 다행이다. 바깥 놀이 못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극적으로 타결 되었다.
확실히 둘째는 예민한 기질의 아이다. 예민 보스는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콕 집어서 해달라고 얘기한다. 그에 비해 첫째는 까다롭지 않은 순한 기질이다. 손이 덜 가는 아이다. 집안에 예민이와 순둥이가 같이 산다면 예민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칭얼대는 예민이의 요구에 먼저 반응하게 되고, 찡찡거리는 예민이에게 맞추다 보면 순둥이는 뒷전이다. 그렇다고 순둥이가 발언권을 가지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니 그러려니 넘어가곤 한다. 심지어 이 집 동생은 예민한 구석에 있지만 사랑스럽다. 조곤조곤 애교도 많고, 사랑받을 뽀인트를 두루 갖췄다. 서슴없이 다가와 내 품에 안기고, 무릎 자리를 차지하는 아이는 둘째다. 형은 멀찌감치 서 있거나 한 발 뒤에 자리를 잡는다.
보통 5세 동생이 7세 형을 이기기는 어렵다. 이 집에 형은 승부욕이 남달라서 지는 걸 엄청 싫어한다. 동생이라고 봐주고 그런 건 없다. 형은 운동신경이 좋아서 신체 활동에서 동생을 월등히 앞선다. 종이 접기나 그림 그리기 등 다른 활동을 할 때도 동생은 형을 보고 따라 하거나, 형의 도움을 받아야 마무리가 된다. 평상시 형이 동생을 이긴다해도 동생의 부캐, 예민이가 작전개시 할 때는 어쩔 수가 없다. 져줘야 한다.
예민이 동생이 이길 때가 또 있다. 둘째는 눈치싸움에서 막강하다.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상황파악이 빠르고, 눈치가 빤한 동생은 어리바리한 형보다 고지를 선점하곤 한다. 동생 찬스를 기가 막히게 활용해서 쐐기를 박는다. 그날도 동생이 선제골을 넣었다.
"(형)지안이가 (동생)웅이를 자꾸 괴롭혀요."
퇴근하고 돌아온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마디 하셨다. 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나는 퇴근 준비를 하는데 그 틈에 둘이 한판 뜬 모양이었다. 거실에서는 웅이 동생의 짜증 섞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날쌘돌이 형아가 장난으로 동생을 툭 건드리고 갔나 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생은 울음 기술을 선보였다. '형이 일부러 그랬어.'라고 말하고는 동생은 더 크게 울어댔다. 누가 봐도 동생이 형한테 당해서 울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어머니의 짐작이 당연했다. 내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일 년 넘게 이 아이들과 지내면서, 기질이나 성향을 알게 되니 둘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을 읽게 된 듯하다. 곧이곧대로, 액면 그대로만 보지 않는다. 그랬더니 큰 아이가 짠해졌다. 형아가 일부러 그랬다면서 자기 좋을 대로 말하는 작은 아이가 어찌나 얄밉던지. 형이라서 번번이 양보하는데도, 좋은 소리는 못 듣고, 괜한 오해까지 받으니 내가 더 억울했다.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 반대인데요."
예민이 동생에게 치여서 자리싸움에서 밀리는 순둥이 형아를 대변하고 나섰다. 나라도 형아 편을 들어야지 매번 예민이가 이기는 꼴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감정이 앞서고,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건 아마도 나 역시 순둥이 첫째라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