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숭민숭한 나에게 건네는 새해 감정 처방전
예전 예능이 재미있는 게 참 많았다. 요즘 구독자 수가 엄청난 유튜브 개그 콘텐츠보다 TV 지상파 예능이 그리운 걸 보면 옛날 사람 같다. X맨에서 '당연하지' 게임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당연하지'로 답해야 이기는 게임이다. 온갖 억측과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받아도 일단 긍정으로 답해야 이긴다. 반박하거나 부연설명을 못한 당사자 혼자만 답답한 상황이 시청자에게 큰 즐거움을 안겼다.
수긍 먼저, 판단 나중
문득 이 게임이 수업 시간에 생각났다. 딴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인간 관계가 '인정하기'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듯했다.
아이돌보미 교육을 받았다. 아이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사랑스러운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살펴보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상호작용을 나름 잘한다고 자부했는데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발달과정을 훑어보는 게 아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신체, 언어, 인지, 사회성 등 영역별로 발달과업을 배웠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서발달이었다.
정서란?
-자극에 대해 나타나는 반응으로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 반응하는 것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고 교감하는 매체, 정서를 통해 생각과 느낌 표현하고 전달
-다양한 경험으로 배우는 사회적, 문화적 산물
태어났을 때 정서는 단순히 ‘좋음’과 ‘싫음’ 뿐이다. 성장하면서 점점 세분된다고 한다. 놀라고, 화나고, 슬프고, 무서운 기본적인 정서로 시작해서 18개월 무렵에는 자기 자신, 자아를 인식하면서 그에 따른 정서가 나타난다. 자아개념 발달을 토대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거나 상대방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감정이 생긴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기에 아이가 동생을 극도로 시샘하고, 질투하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양육자는 아이가 보이는 정서적 표현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해하여 그 감정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양육자의 반응을 통해 영아는 세상에 대한 안정감을 얻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형성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정서를 잘 헤아리지 못하거나 표현에 서툴다. 양육자가 대변인이 되어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말로 표현하면 아이도 점차 감정을 배워나간다.
네가 동그라미해서 세모세모했구나.
이렇게 말해보란다. 동그라미 상황과 세모세모 감정을 잘 읽어서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말이다.
그리고 감정을 재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게 중요하단다. 감정엔 죄가 없으니까. 상황에 따라 어떤 감정도 생길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고, 분이 가시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감정 자체로는 잘못된 게 아니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수용 받았는지, 그 경험치에 따라 아이의 자존감이 달라진다.'는 말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수용 받아본 경험이 있는 아이는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스스로에게도 관대해진다. 본인을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사과했다.
나는 어린아이만큼 감정에 서툴렀다.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밋밋하지만, 안정적인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실상은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없었다. 제때 풀지 못해 돌덩이처럼 뭉쳐버린 어깨마냥 감정이 무뎌져 버렸다. 세세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저 기분이 좋으면 '대박' '개꿀' , 기분이 나쁘면 '왕짜증' '된장' 이런 말로 퉁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어떤 정서인지 살피기보다 옳고 그름을 가려서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곤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엄청나게 큰 사고가 터졌다. 재난 영화에서나 볼 듯한 참사가 벌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유족들의 울먹이는 인터뷰를 들으면서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깊은 상실감과 아픔까지는 닿지 못했다. 내 마음의 공감 점수가 형편없었다.
새해 소망 한 가지로 '감정에 불붙이기'를 꼽았다. 무심했던 내 마음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게 시급하다. 다 큰 어른답게 감정에 성숙했으면 좋겠다. 내 마음속 다양한 정서를 확인하고,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 전달하게 되기를. ‘감정을 판단하기보다 이해와 받아들임이 우선’이라는 규칙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하기를 바란다. 2025년에는 오은영 박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 '그랬구나!'를 나에게 적용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