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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Jan 12. 2022

논어를 필사한 지 오늘로 44일

망치를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매일 논어를 쓰기 시작한 지 오늘로 44일 째다. 

'되고자 하는 자신의 어떤 모습'을 위해 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우선 건강하다. 

인간이란 원래 의식적인 목적을 가진 행위의 실천이 3일을 넘기기 어렵다(고 일반화해본다. 나만 그러지 않을 것이야ㅠㅠ).

이 의식적인 행위를 무려 44일을 지속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긍정과 신뢰를 회복하기에 충분하다.


매일 논어를 쓴다는 것은 나와 한자의 거리감을 10 정도 좁혀주었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따라 쓰며 소리 내어 읽다 보니 반복되는 한자가 눈에 들어오고 더듬더듬 직역을 하게 되었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면 즐겁다고 하신 것이 이런 기분인 건가?  

공부가 재밌어지는 희귀한 경험을 해보다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매일 논어를 쓰다 보니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어온 효, 예, 충(孝, 禮, 忠) 등의 익숙한 낱말들이 조금씩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이 말짱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다. 내가 잘못 배운 것인지, 가르친 자들이 잘못 가르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상태가 서로에게 유익하여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다만. '카더라' 말고 내가 직접 경험한 논어의 가르침이 사뭇 달랐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공자는 당대의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후, 공자의 가르침은 동아시아 지배 이데올로기로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다. 역사의 승자들은 '인간으로서의 나아갈 길'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그들이 원하는 틀과 색에 맞춰 변형해왔다.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작동은 차치하고, 개인의 수양이나 개인 간의 관계의 작동원리로 작용하는 개념들마저 그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아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가두어버렸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려웠다. 논어에 해제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그의 가르침은 풀어져 널리 체득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박제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배움과 생활을 구분지은 살아남은 강자들의 의도. 머리와 가슴을 끝내 분리시켜 욕망과 욕구를 살벌하게 좇지만 외양은 '군자의 면모'를 탑재하여 스스로의 영혼을 속이는 기술로 쓰이게 된 논의의 비극이 되었다. 




매일 논어를 쓰다 보니 혼란과 혼돈의 춘추전국시대를 살아낸 동시대 속에 다른 길을 선택한 자들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陳成子 弑簡公 (제나라의 대부) 진성자가 (제나라의 임금) 간공을 시해하자,
孔子沐浴而朝 공자가 목욕하고 조정에 나아가
告於哀公曰 (노나라 임금) 애공에게 말했다.
陳恒弑基其君 진항(진성자)이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請討之 (제나라를) 토벌하소서.
公曰 임금이 말했다.
告夫三子 세 명에게 말하라.(노나라의 당시 세력자 계씨, 맹씨, 손씨)
孔子曰 공자가 말했다.
以吾從大夫子之後 나는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므로
不敢不告也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다.
君曰 告夫三子者 임금이 세 사람에게 알리라 하신다.
之三子 告 不可 세 사람에게 알렸더니 "안 된다(제나라를 토벌하지 않겠다)"고 한다.
孔子曰 공자가 말했다.
以吾從大夫子之後 나는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므로
不敢不告也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다.

- 논어 제14편 헌문 22장

목욕재계하여 조정에 나아가 직언하였지만, 임금에게 돌아온 대답은

실력자들에게 직접 전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그들을 찾아가 말하였으나 결과는 이미 예정된 것과 다름없다. 

대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므로.

체제 안에서 어떤 결정권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므로

시스템 속의 한 개인이므로 

그의 직언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루어지지 않은 진정성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것일까

아니면 한낱 자기 위안일 뿐일까

덕이 아무리 높다 한들 제 명을 살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무도한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현실에서 나약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계급이 사라진 지금, 

하늘이 내린 통치자, 천자가 사라진 지금.

시민 각자가 '군자'인 지금. 대선이 코 앞이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길'을 펼칠 인재로 누구를 등용할 것인가?


논어를 읽고 쓰며 고고한 선비가 될 줄 알았더니 망치를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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