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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Jan 20. 2022

잔소리

나의 미래지향적이자 가치반영적인 적극적 행동 상태

논어 필사를 시작하며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얻고자 성균관대학교 신정근 교수의 <EBS 인문학 특강_논어, 인간의 길을 묻다> 강의와 해당 책을 함께 보았다. 강연의 대목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의 본능과 욕구를 넘어서 타인을 보살핀다는 측면에서 '엄마'는 군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언급이었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별과 관계로서의 엄마뿐만 아니라, 나 외의 다른 존재를 보살피고 거두어 먹이는 행위를 생활에 주요한 역할로 요구받거나 스스로 해나가는 사람이 모두 '엄마'일 것이다.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내 마음과 몸도 괴로운데

다른 생명체를 살피고 돌본다는 것은

극기克己, 수기修己를 하염없이 내재화하는 과정이다.


결혼 7년 만에 생긴 아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롭고 감사하였지만,

출근 시간 약 30분 전에 겨우 일어나며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던 내가(!)

종종 감기몸살로 몸져눕던 저질체력이었던 내가(!)

엄마가 된 이후로는 과연 그때의 나와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변화된 체력과 일상이 가장 신기하다.



군자君子가 될 상인가?



이렇다 할 사회적 활동이 없는 나에게 가장 큰 정치활동은 남편과의 협상, 아이와의 대화이다.

정기적으로는 양치질과 샤워를 하도록 하기 위한 설득, 비정기적으로는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 장보기 목록의 의견을 모으기, 거시적으로는 한 해 목표와 연간 계획 세우기와 명절의 동선 관련 회의, 미시적으로는 '오늘 청소할지, 말지'가 있겠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족의 생명과 평화가 달린 사소하며 본질적인 과제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정치의 기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정리하자'를 어떻게 상대에게 전달할 것인가? 너무 자주 말하면 가벼워지다 못해 쓸모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그렇다고 내가 너무 참으면 감내하느라 골병이 든다. 

결혼 초에는 '말 꺼내기 적절한 시기와 건네는 말투' 등 기술로 접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남편이나 나나 서로 웬만한 상담기법 등을 주워들은 사람들이다 보니

기술만 대입한 채 영혼 없이 리액션을 보이거나 속뜻은 가시를 심고 말만 번지지르할 경우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며 더 큰 싸움으로 번졌다.(선무당이 사람을 잡았다.)


子曰 君子 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자왈 군자 의이위질 예이행지 손이출지 신이성지 군자재)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로써 바탕을 삼고, 예로써 그것을 행하며, 겸손함으로써 그것을 드러내며, 성실함으로써 그것을 이룬다. 이것이 군자다.

<논어> 위영공 17장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란한 대화기술을 동원한 대화들이 공허한 이유는 '의義'를 바탕에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다 너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하는 말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가 원하는 것, 즉 사사로운 마음(私心)을 바탕에 두고 이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좋은(또는 옳은) 목적이라고 모인 단체나 조직의 회의에서도 이런 태도는 심심찮게 만날 수 있고, 첨예한 생활의 이익이 걸린 가족 간에는 더욱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부부지간에야 서로가 가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되지만,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절대적으로 생존을 의탁한 불리한 지위에 있는 아이들은 교묘한 훈육의 망을 피해 가기는 어렵다. 엄마인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사심에서 비롯한 것인지, 부모 다움에서 비롯한 것인지.. 


화가 나면 혼내지 마세요


한창 옳고 그름이 명확하던 때에 공부방 교사를 했다. 퇴근 후, 지인들과 읍에 있는 원불교 교당에 가서 마음공부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교무님께 배운 '구나, 겠지'는 한동안 내 안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한 발 떼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또 한 가지는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니 언성을 높이는 일들이 많아 아이들을 지도하는 데에 있어 교육행위인지/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교무님의 조언은 참으로 간단명료했다.  

"화가 나면 혼내지 마세요."

화가 났다는 것은 이미 자기감정에 압도된 상태이므로 사건을 침착하게 들여다볼 수도 없으며 어떤 의견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인 것 같지만, 실은 내 감정에 사로잡혀 나의 통제와 조절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단지 내 입은 감정의 배출 통로가 되었을 뿐이고, 마구 쏟아진 감정은 그 어떤 교육도 대화도 아닌 것이다. 


토의로 결정한 방학 계획에 따라 오전 나절에는 아이와 공부를 한다. 총 3과목인데, 한 과목당 평균 15분 정도이다. 약 2년 전쯤, 이렇게 나와 공부를 시작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이가 한글과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시작하였고 제법 잘 되었다. 슬슬 욕심이 올라왔다. 난도를 조금씩 높였고, 과목도 늘렸다. 아이가 따라오면 따라올수록 내 안의 사심은 더욱 커졌다. 재밌는 놀이로 시작한 공부였는데, 마주 앉아 짜증내고 화내는 일이 많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를 스펙 삼으려는 나의 사심을 스스로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아이와 남편이 적극적으로 본인의 생각을 나에게 알렸다. 시행착오 끝에 나는 아이에게 '배움의 기쁨'을 훼손하고 사심을 숨긴 욕망의 질주(?)를 멈출 수 있었다. 


子曰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
(자왈 가여언이불여지언 실인 불가여언이여지언 실언 지자 불실인 역불실언)
공자가 말했다. 더불어 말할 만 한데도 더불어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 것이요, 더불어 말할 만 하지 않은데도 더불어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고, 또한 말을 잃지 않는다. 

<논어> 위영공 7장


허리 펴고 앉아라,

꼭꼭 씹어 먹어라,

(안장다리로 서지 말고) 발 똑바로 서라

집중해서 해라,

양치질 꼼꼼히 해라,

다녀왔으면 씻어라.

너는 귀하다.

네가 귀하듯 모두 귀하다..


내가 아이에게 하는 대부분의 잔소리는 이것이다. 

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

내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전수하는 과정이 생활에서 '잔소리'로 변질되어 버렸다. 

어쩌면 언급하는 횟수가 많아져서 본질을 흐린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자랑할 만한 모습'을 바라는 나의 욕망이 개입될 때, 이 욕망의 개입이 무수히 반복되어 자신조차 속이게 될 때 말도 잃고 급기야 아이에게 원망을 듣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일 테다. 


논어에는 '지知'자가 자주 나온다. 

필사를 하며 엉뚱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矢(화살 시)+口(입 구)= 知

무언가 안다는 것은 과녁을 향해 분명하게 쏜 화살처럼 음흉하지 않는 명료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사심의 숨김없이 본심과 말이 일치된 상태에서 뱉는 말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결국 지혜로운 자는 나를 속이지 않는 자이다. 


다시, 군자다.

그러기 어려우니 군자에게 극기와 수기가 늘 따라다니는 것이다. 적당한 가면은 우리를 보호하고 지위를 보장해준다. 민낯은 서로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면 파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도 자식에게만큼은 부모라는 지위를 이용해 나의 욕망을 투사한 실없는 말은 많이 줄이고, 따뜻한 잔소리만 좀 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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