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카라미아.“

04(1). 드디어, BDSM에 대한 이야기.

by Da테

And I've been waiting for you all this time

I adore you, can't you see, you're meant for me?

난 여태껏 너를 기다렸어

난 널 찬미해. 모르겠니?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배아에서 태아로, 태아에서 어찌어찌 고등학생이 된 나의 자의식을 세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막 망치와 정을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성향에 대해 이야기 시작했다.


여기서 반전, 그가 자신의 성향을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바로 그 목적으로 만났을 테니까. 분당소망(BDSM) 행위를 수행하는 것 말이다. 청소년 두 명에서, 보호자의 동의 없이, 세뇌를 당하거나, 금전적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자발적으로, 서로 간 합의가 된 상태에서, 일탈적인 비행으로 남을 엿 먹이려 하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에 대한 우호적이고 희망적인 전망을 가지고(그랬었나?)... 서 말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BDSM 성향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질 예정이므로, 돌입하기 전에 그 정의를 간단하게 설명해 둘 것이다. BDSM에 대한 설명이라니! 마치 라라랜드의 희망찬 도입부에 등장한 고속도로에 갇힌 운전자가 된 기분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데, 고속도로는 지긋지긋한 정체로 꽉 막혀있고 설상가상으로 다른 운전자들은 차 위에서 태연하게 춤을 추고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 따로 없고, BDSM 또한 그렇다.




BDSM이란, Bondage, Discipline, Dominance, Submission, SadisMasochoism의 약자로, 구속과 훈육, 지배와 복종, 가학과 피학 등을 포함하며 상호 간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성적 활동을 폭넓게 칭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행위는 육체적 교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교류를 포함한다. 참여자들이 경험하는 권력의 다이내믹, 역할과 정체성은 유동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다양성을 가진다. 이러한 수행을 자신의 정체성에 어떻게 위치매김하는지, 어떤 커뮤니티에 속하는지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하며, 시기나 장소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BDSM은 비규범적인 성별 표현, 젠더 아이덴티티처럼 병리화되고, 사회적 낙인의 대상이 되거나 매체에서 과잉대표 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를 만난 뒤에 한국의 BDSM 커뮤니티에 이년 정도 속해 있었지만,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완전히 접점을 끊었고, 고정적인 권력관계를 전제로 한 관계를 맺은 것은 한 번뿐이다. 반대로 그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수직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경우에만 친밀한 교류를 맺어 왔지만 해당 커뮤니티에 소속하거나 장소에 방문한 경험이 없다. 나는 커뮤니티에 속해 있으면서 '어떠한 사람들은 그저 자신과 가까워지기 위해 무수한 사회적 리스크를 기꺼이 감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물론 여성들은 더욱 큰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존재했다.’


아무튼 그가 자신의 (지배적이고, 따라서 성적인 우위에 서야 하며, 가학적인 행위를 즐기는) 성향에 대해 정중하게 가르쳐 주었을 때, 나는 굳게 결심한 것이다. 그가 욕망할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 말이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합의된) 성관계를 해본 경험도 없지만, 나는 내가 그에게 사로잡힌 것만큼 그를 사로잡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성적 취향 즈음이야 여성들이 이상적인 이미지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개조하듯 과감하게 재구축할 수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반 쪽으로 잘라내고 싶다고 염원해 본 적이 있는 한국의 여학생이었던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자신의 관심사가 신체 개조에서 정신 개조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 같은 일인지!




그를 만나기 전에도 내가 비규범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써 왔다는 사실을 우선 언급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내 유년기에 대해 쓴다면 그 글은 한니발 렉터의 수기나 정신병적 소견에 대한 감정 보고서 따위로 읽힐 것이 뻔하니 굳이 첨구하지 않는다.) 성 경험도 없는 주제에 성적인 글을 썼던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도 그딴 글을 대신 써 주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무언가를 성적으로 욕망 하고 싶으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 써야 했다. 그것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온갖 유독한 성의 표상들을 감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해독(解毒)할 수 있는 능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반드시 수반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묘사한 성적인 글을 읽고 있노라면 미국의 여느 교회가 수행한 '음란한 장면을 모조리 뺀 24분 16초짜리 록키 호러 픽쳐 쇼'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주로 썼던 사랑과 폭력에 대한, 아니 사랑의 맴매에 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혹은 그 세 가지의 혼합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전부 남성이었다. 나는 사냥꾼, 투우사, 범죄자, 군인, 하다못해 짐승 등 해로운 남성성을 대표하는 모든 표상들의 성애자였고 그것은 글을 쓰는 주기가 얼마큼 벌어지는가와 상관없이 유지된 취향이었다. (내가 콜로세움이 건재한 시기에 태어났다면, 검투사가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보기 위해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쓴 소설들은 아무리 열심히 닦아내려고 해도 다음 날이면 온갖 비윤리적인 상상력과 과감한 시적 허용으로 흥건해진 마룻바닥 같았고, 몇 년이 지나도 결코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홀연히 나타난 수상하고 황홀한 여성의 재떨이든 의자든 모든지 되고 싶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심경의 변화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를 가로지르는 관통상을 입은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저번 주 주말 아담스 패밀리의 실사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아담스 가의 안 주인을 보면서 느낀 기묘한 기시감이 모든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베푸는 모든 미심쩍은 성적인 관심들이 황홀했던 것이다. 그가 바로 나의 카라미아였다! 장미 손질을 할 때 그 밑동을 가차 없이 잘라 버리고, 내 사지를 묶은 고통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팜므파탈의 전형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 폭력을 아낌없이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람. 우아함 뒤에 위험천만한 리스크가 도사리는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첫 이상형에게 폭력의 수혜를 받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지극히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에 의거하면) 의식에서 자의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신이 나를 호명하는 거룩한 순간이기도 한데, 하나님이 내게 '하루빨리 BDSM을 행하라'라고 명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여, 왜 저를 시험하십니까?)


두 번째로,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선 우리는 두 번째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 출발점이니까.


(참고로 오늘은 우리 커플의 2주년이다. 내 사랑, 나의 사카린, 오늘 밤은 다정한 꿈을 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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