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Crisis.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선생 하나를 고소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어느 날 꿈을 하나 보았다.
나는 작고 삭막한 반 지하의 방에 서 있다. 시멘트와 흙이 불길하게 섞인 냄새가 나고 햇빛은 딱 절망적인 기분이 들 정도로만 새고 있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나를 추행한 그 남자가 몸통 만한 창문을 반쯤 연 채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몸이 향한 방향을 통해 그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려 하고 있음을 알았다. 창문 옆에 달린 커다란 자물쇠가 보였다. 잠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구나.’ 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남자의 손가락 하나가 호선을 그린 입술 위에 놓였다. 쉿. 그는 조용히 내 주의를 환기시키고는,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자취를 감추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창문도 열려 있고 자물쇠도 풀려 있었지만, 나는 폭력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낸 몸뿐이라는 법칙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방에 오랫동안 남아있게 될 거란 것을 예감했다. 홀로.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방에 서 있다.
어린 날의 예감이 맞았던 것이다.
아, 그러나 대체 그 ‘그녀 자신‘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여성이란 무엇인가? 장담하건대, 나는 모른다. 당신이 알 것 같지도 않다.
—버지니아 울프, <여성의 직업> 중에서—
‘여성이 된다는 감각은 과연 라벤더처럼 감미롭고 땀방울이 맺힌 열대 과일처럼 신선한가? 그것을 베어 무는 감각처럼 충분히 중독적인가? 애초에 그것이 긍정적인 느낌을 우리에게 안겨 준 적이 있기는 하나? 정말로?’
고등학생의 나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노려보고 있다. 당시 유행했던 페미니즘 입문서를 읽은 뒤에 적은 감상문은 ‘나는 여성 행세를 하는데 지쳤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꾹꾹 눌러쓴 듯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건 마치 ’ 당신네들은 이런 걸 어디서 배워와 잘도 견뎌내고 있는 거야?‘라고 투덜거리는 것 같다.
국내 입시를 그만두고 해외 입시를 시작하며 해외 입시 전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자습실에 앉아있는 나의 머리는 바짝 깎여져 있고 숫기도, 통 자신감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세 가지뿐이다. 의기소침하거나 모든 것에 무심하거나, … 어딘가 비장해 보인다. 함께 다니는 친구는 없다. 그러나 고립된 상태가 학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당시의 나는 여성으로서 추행 하기에 적합한 대상인가? 이런 종류의 질문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그 선생의 위치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머릿속으로 체크 리스트를 만든다. 무리에서 충분히 소외되어 있는가? 체크. 자신의 의견이나 불만을 당당히 피력하지 못하고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가? 체크. 그 말은 즉슨 위해를 가해도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반항하지 않을 것 같은가? 이런, 체크 메이트다. 누가 그런 공격에 대비를 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서술에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언어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경험한 폭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괴로운 일이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납득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본 성적인 회유가, 그 살벌하고 친밀한 교접이 뇌에 찍어 내린 낙인의 정교한 문양을 들여다보는데만 거진 6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언어가 부재한 곳에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이 몰아쳤다. 한 친구가 예리한 직감을 발휘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녹음한 전화로 나눈 대화는 불쾌한 울렁거림과 느닷없는 쾌활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녹취록의 기록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진난만하게 보일 정도로 수다스럽다. 초조하고 흥분해 차 있는 듯한 나의 감정이 그대로 전이된 모양인지 친구 역시 흥분해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격앙된 의조로 이것저것 의견을 내놓는다.
나는 학원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건을 접수한 것은 대학교 합격 소식을 접한 뒤였다.)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두긴 했지만 결국 수업을 바꾸는 일도 없었다. 부모님에게 알릴 엄두도 나지 않았고, 입시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성추행범을 대면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녹취록에서 나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학원은 … 나 학원은 어떡해? 그게 여기에 있는 거의 유일한 전문 학원인데.)
다만 첫 수업의 몇 주동 안은 책상 위에 커터칼을 놔두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다시 일 년이 지났다. 대학교의 입학 허가서가 날아왔고, 잔뜩 술에 취한 내가 눈물과 원망을 어머니의 무릎 위로 쏟아내며 뒤늦은 사건 접수가 시작되었다. … 합의금으로 비싼 대학의 입학금을 치른 뒤 나는 사건을 까마득히 먼 옛날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생경한 자아가 있었다. 아주 날렵하고, 자비가 없으며, 잔인한 어조로 거침없이 떠드는 새로운 내가.
이렇게 된 김에 그 새로운 자아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편이 좋겠다. 이전에 나는 머릿속으로 쓰는 모든 편지(연애편지와 저주의 말, 심지어는 유서까지)를 읽고 깐깐히 감독한다는 점에서 그를 ‘나만의 B사감’이라고 불렀었다.
B사감의 성격은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고 거침없었다. 당연하다. 그는 오로지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태어난 존재였다. 그는 나의 은밀한 동경의 대상이자 이상향이며 유일하게 현존하는 카리스마 그 자체다. 그가 주로 도맡은 일은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솜씨 좋게 눌러 죽이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은 막 불이 붙기 시작한 불꽃처럼 환해졌으며 (그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시 무신경해진 내게 잔인하고 당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봐, 널 지킬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어. 가슴속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빼곡해진 내가 대답한다. 내가 널 반 만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인성적인 흠결은 있을지 몰라도 B사감은 놀라울 정도로 유능했다. 솜씨 좋은 어부처럼 나를 모든 복잡함과 애매모호함에서로부터 낚아채는 법을 알았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나를 마비시키는 법도 잘 알았다. ‘이상해. 내가 마치 나무 타는 법을 익히지 못한 물고기가 된 기분이야.’ 내가 중얼거리면 그가 대신 대답했다. ‘한숨 자 둬. 더는 생각하지 말고, 느끼지도 말아. 그게 네가 살 길이야.‘
B사감의 출현은 이후에도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생길 때마다 감정을 유능하게 박멸해 그 공을 인정받았다. 그러자 곧 그가 풍기는 독특한 향이 내면에 도사리게 되었다. 그건 B사감의 보호 속에 깔린 불편한 전제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넌 아직도 충분히 강하지 못해. 늘 중요한 순간에 무능하고 순진한 판단을 내리거든. 그게 내 속을 얼마나 터지게 하는 줄 알아? 대답해. 내가 널 얼마나 경멸하는 줄 아느냐고?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다. 정신을 차리면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심장이 발치에 떨어진 것처럼 한편이 시리지만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작고 비좁은 방이 아니다. 나는 안전하게 현실 속에 있다.
그가 맡은 바 소명을 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