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Birth.
We learn about the world when they do not accommodate us.
Not being accommodated can be pedagogy.
우리가 세계에 대해 배우는 순간은 세계가 우리를 포용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교육적일 수 있다.
–사라 아메드, <An Affinity of Hammers>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장거리 연애를 접촉의 완전한 단절로 인해 관계를 서서히 질식시키는 비극이라 여기지만, 나는 비교적 큰 위기 없이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물론, 그가 헐떡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나 혼자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시차가 거의 없고, 물리적 거리 또한 타국 간에 비해 가까웠던 점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건 내가 문자라는 세계의 주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말은, 내가 물리적인 근접성을 요구하는 행위—이를테면 함께하는 저녁 식사나 여행—보다도, 거리의 제약을 뛰어넘는 공동의 대화, 독서, 문화 활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정치적 실천이나 창작 활동 역시 내게 중요한 삶의 축이었고, 그것을 정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지해 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비록 신체 접촉이 없더라도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그의 목소리, 그가 전달하는 말, 그가 기록하는 텍스트들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었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는 결핍이라고 느낄 수 있을만한 모든 부분을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말소시켰다. 그것은 내가 하루가 멀다 하고 파고드는 내면세계의 양수가 되어 주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두 눈을 감고 그 따스한 온기와 안락함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한편 습관적으로 문자를 탐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억을 발굴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졌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이 다룰 수 있는 몇 없는 소재 중 하나가 공통의 추억이니까. 나는 5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의 원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특출난 점도, 인상 깊은 구석도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특별히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는 무난함’이 ‘유일한 특징’인 분당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고 자아도 그에 걸맞게 흐리멍덩했다. 좀처럼 사회가 제시한 정상성이나 규범에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부를 떠돌았다. 보헤미안 적인 성향이 짙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놀라울 만큼 자본주의적 감수성이 부족했을 뿐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순응해 부를 축적해야겠다는 열망의 결여는 나를 규범 사회의 쾌락과 라이프 사이클을 대놓고 등한시하는 학생으로 만들었다.
입학 당시, 나는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는 교과서 대신에 읽고 싶은 책을 책상 위에 쌓아 놓고 읽곤 했다. 자신이 정말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보다 가치관에 따라 교사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사실이 더 인상 깊다. (어떤 선생님은 점잖게 주의를 주었다. 또 어떤 선생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창설한 인문학 동아리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물론 나는 그 동아리에 가입하여 페미니즘적 설교와 비아냥이 송두리째 첨삭당한 교부를 냈다.)
2학년 겨울 방학 때 입시 공부를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내가 입시형 독서실에서 짐을 빼고 있을 때, 마중 나온 원장님은 나를 보며 ‘네가 결국 떠나는구나.’ 하고 허탈함과 기막힘,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자발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길 바라는, 그리하여 고독이 자신의 가치와 특별함을 증명해 주리라 믿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심하게도 나는 내게 선택지가 거의 없다고 믿었다. 유학을 결심한 것도 한국의 입시 경쟁을 뚫을 자신도, 그럴 의욕도 사라졌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판단이 깔려 있었다. 적어도 몇 년은 더 헌신할 줄 알았던 입시 학원에서 짐을 빼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공포에 질려 엉엉 울기까지 했다.
‘눈에 띄지만 않으면 안전하다’라는 모토 아래 아무 곳이나 어슬렁 거리는 기술은 이때 체득한 것이 틀림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자신이 왜 사회와 이토록 불화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적법한 언어를 찾기 위한 정형 행동이었다. 우리에 갇혀 좌절감을 느낀 동물들이 곧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그러나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감각은, 타자와 자신을 구분 짓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는 기분 좋은 승인이기도 했다. 내게는 섹슈얼리티가 그랬다. 가장 자극적이고 거부감이 드는 만큼 흥미진진했다. 누구와 연애하고 또 잠자리를 가진다면 언제,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한 문제 말이다.
내게 독실한 크리스천 신자가 되겠노라 결심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원의 기도실처럼 썰렁하고 금욕적인 공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역시 이 땅의 대부분의 청소년들처럼 자유로운 인터넷 연결망의 수혜를 받고 있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탐색할 수 있었고 ‘금단의 영역’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돌 산업이 차지하는 막대한 위상이다. 아이돌은 저학년 여자아이들을 지극히 이성애 규범적인 산업에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매체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유혹에 아무 저항 없이 순응하는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이전 알페스 논란으로도 알려진 2차 창작물을 쓴 것이다. 진지한 창작 행위라기보다 음습한 취미에 가까웠던 그 글쓰기는 길고도 얇게 오랫동안 이어졌다. (성년이 되었을 때 내가 기쁘게 이행한 첫 번째 일은 퀴어 소설 쓰기였는데, 그중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레이너스의 5막을 통속 소설로 다시 쓰는 작업도 있었다.)
즉,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비교적 성에 관한 특수한 독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론적으로는 정통한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론은 언제나 현실과 괴리하는 법이다.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처음 남자를 사귄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초반 때였는데, 방송부 소속에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친구였다. 관계는 한 달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당시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급진적인(어라라!) 사상적 전향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에게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듯 발표의 내용은 커녕 그것이 지닌 함의를 이해할 최소한의 지성조차 없었다. 그러니 괜찮다, 나는 여전히 풍성한 단발머리에 화장을 한 여성이니까!
진짜 문제는 운동을 좋아하고 그의 무지를 대놓고 깔보는 나의 왕성한 테레스트론이 그의 앙증맞은 남성성을 위협한 것에 있었다. 나는 방과 후에 시내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 자습실 책상에 고개를 쳐 박고 있기를 좋아했다. 그는 작은 키와 앵앵 거리는 목소리로 인해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데 여러 번 좌절을 겪었다. 불행히도 나는 남자의 기를 살려주는 데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결국 내가 ‘네 머저리 같음에 환멸이 난다’라는 취지의 문자를 전송하며 관계는 끝이 났다.
관계가 끝난 뒤에 어떤 공분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관계를 정리하자마자 곧바로 화장을 관두고 머리를 투블록으로 잘라 그에게 한층 더 깊은 분노를 샀다는 사실이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의 몸이 긴장인지 혐오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머리를 잘랐을 당시 한국에서는 강남역 사건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성역할과 모든 여성적인 성별 표현을 거부하는’ 4B운동이 한창 인터넷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4B 운동은 비연애, 비혼, 비출산, 비성관계'를 지향하는 한국 여성주의 운동이다.)
따라서 내 민낯과 짧은 머리는 교실과 여성 화장실에서 자주 두려움을 샀다. (넌 노조에 가입하려고 입시 준비하니? 라는 교원들의 질문과는 별개로.) 그러나 이러한 시선은 오해에 가까웠다. 물론 4B 운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스타일에 대해서는 4B운동 조류에 편승한 정치적 요구가 있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레즈비언의 부치-팸 문화였다*(레즈비언의 성별표현 방식 및 관계 내의 역할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부치는 ‘남성적인’ 성별 표현 및 행동양식을, 팸은 ‘여성적인’ 성별 표현 및 행동양식과 관계한다.)
나는 일찍이 내가 여성을 연애 대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알고 있었다.’ 그 깨달음의 순간은 마치 작은 우주의 비밀을 엿보는 듯한, 깊고 차분한 평화로 가득했다. 실망스러운 첫 이성 연애가 끝나고, 서투른 화장을 억지로 반복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쌓여가자, 나는 자연스럽게 이전부터 편하게 느껴왔던 남성적인 성별 표현을 해 보고 싶다는 강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 시기의 나는 동성애적 취향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도, 남성으로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었다. 망설임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그 모든 변화는 내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저 당연하게 흘러갔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요?” 당시 머리를 자르기 위해 찾아간 남자 미용사가 했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 심장하다. 그가 하도 겁을 주길래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해진다. 왜 그깟 헤어 스타일 하나 때문에 그가 전전긍긍하며 나와 씨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타협 끝에 빗질이 시작된다. 자르고 난 모습이 그렇게 별로면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면 된다. 나는 피로해져서 눈을 감는다.
여기서 필름을 빠르게 돌리자. 잠깐의 체념. 한숨.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감각에 눈을 뜬다. 그러자 완전히 낯설어 보이는 내가 거울 앞에 서 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남동생이랑 똑같이 생겼네. 단출한 감상을 뱉는다. 집으로 돌아와 스타일의 변화가 안겨주는 신선한 감각을 즐긴다.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레즈비언 어플을 다운로드한다(그게 청소년 레즈비언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상상하지 않는다.
접촉. 풀어 말하자면 보다 구체적인 붕괴의 시작이었다.